반성과 용기와 희망을 안겨 준 책, 쇳밥일지
답답함과 부끄러움 그리고 용기와 희망.
천현우 산문 <쇳밥일지>를 보면서
내 안에 차근차근 다가온 감정들이다.
쇠를 만지는 무수한 노동들을 알지 못한다.
나와는 너무나 먼 이야기라고 여기며 무관심하게 살아왔다.
글쓴이가 “쇠에다 대고 하는 바느질”이라 표현했던 '용접'이란 것도
지금 사는 곳에 집 지을 때
건축 노동자들이 일하는 걸 얼핏 바라본 게 전부다.
그때도 불꽃 튀는 장면이 멋지기보다는 좀 겁이 났더랬다.
<쇳밥일지> 곳곳에서는
내가 잘 모르는, 알려고 노력한 적 없는
쇳밥 노동 이야기가 차곡차곡 담겨 있다.
거기에 더해진 한 청년 노동자의 고달프다 못해 ‘너무한’ 청춘 비망록.
휴, 답답하고도 아팠다.
“마음을 다치지 않기 위해선 무엇보다 냉소하지 않는 게 중요합니다. (…) 냉소는 인간의 가장 나쁜 감정입니다. 분노나 증오마저 마음먹기 따라 좋은 방향으로 이끌 수도 있지만 냉소는 그저 사람을 게으르게 만들 뿐이에요. 대상을 이해할 생각도 없고 공감하지도 못하니 무슨 발전이 가능하겠습니까.(272쪽)”
글쓴이가 청강대 졸업생들한테 축사로 전했다는 말,
그 가운데서도 ‘냉소’라는 낯익은 (하지만 참으로 좋아하지 않는) 낱말 앞에
뭐에 들키기라도 한 듯 마음이 화끈거렸다.
냉소, 냉소라….
어쩌면 내가 지금 그 상태에 빠져 있는지도 모른다.
다른 것도 아닌 ‘농사 노동’ 앞에서.
자라는 모습은 때마다 다르지만
씨 뿌리고 김매고 거두어 갈무리하기까지.
그 과정에서 느끼는 행복은 변화무쌍한데
그에 따르는 노동은 규칙성 있게 힘들고 지루하며 어렵다.
농작물마다 번갈아 찾아드는 흉작까지 되풀이해서 겪다 보면
상처를 입지 않을 수 없다. 나도 내상이 적지 않다.
아직도 고추를 따고 말리는,
여전히 등에 약통 매고 밭을 오가는,
허리 굽은 할머니와 얼굴 까맣게 탄 마을 분들의
꾸준하게 지난한 노동.
봄부터 지금까지, 어느 때는 주말조차 쉰 적 없이 밭에서 보낸
어설프지만 진실했던 산골 부부의 노동.
그 모든 것들에 무심해지려 하고 무감해지려 하고.
하여 정말로 무심하고 무감해지기 일보직전인 듯한
이 감정의 늪에서 빨리 헤어 나와야지 싶었다.
<쇳밥일지>에서 묻어난 ‘쇠’와 ‘글’과 ‘삶’.
우여곡절 넘치는 그 솔직함과 당당함이
나를 부끄럽게 하더니만 끝내는 전과 달라지고 싶게끔,
딱딱하게 굳은 마음을 녹여 준다.
반성과 용기와 희망을 함께 안겨 주는
이런 책이 나에겐 참 좋은 책!
“마산에서 얌전히 용접만 하고 살았다면 평생 볼 일 없었을 사람들의 환대와 존중은 기쁘고도 불안했다. 공장 일꾼이란 정체성으로 현장의 서사를 팔아 나 혼자 비겁하게 출세하는 건 아닐까. 진짜 현장 노동자들은 천현우를 기득권 앞에서 글 재롱 부리는 간신으로 생각하진 않을까. 아저씨의 고마운 덕담에 최근 들어 점점 무게를 불려나가던 걱정의 무게가 훌쩍 줄어들었다.”(284쪽)
“앞으로 내가 일해나갈 곳은 현장이 아닌 사무실. 파란 작업복은 하얀 와이셔츠로 바뀌고, 메꾸어나가야 할 공백은 철판과 철판 사이에서 지면과 지면 사이로 바뀐다. 하지만 돌아오리라. 내가 지나쳐왔던 세상. 담배 냄새와 절삭유 냄새로 찌든 곳. 차가운 금속과 뜨거운 불꽃의 감촉이 공존하는 곳. (…) 비록 몸은 다른 곳에 있을지라도 오늘도 현장에서 치열하게 일하는 쇳밥꾼들의 마음을 잊지 않으리라.”(287쪽)
새로운 선택 앞에서 번뇌하고 방황했던 마음을
가감 없이 글로 박아낸 사람, 천현우.
그이가 지나온 삶과 앞으로 걸어갈 길에 응원을 보내고 싶다.
다만 바람이 있다면,
그이가 지금보다 더 많이 알려지고
더 좋은 자리에서 머물게 되더라도
글자에 새겨 넣은 현장 노동자의 진솔한 마음을
꼭 잊지 않고 살아가기를….
<쇳밥일지> 보는 내내
입에서 계속 흐르고 흐르던 노래가 있다.
이 노래 처음 안 게 대체 언제 적인데
노랫말이 이렇게나 다 떠오르는지.
(그럼에도 이렇게 나지막이 불러 보는 건 참말로 오랜만이다.)
노동도 기름밥도 해방도 그 아무것도 몰랐을 때에도
난 이 노래가 그냥 좋았다.
우리가 서 있는 모든 곳은
그 노동이 무어든 간에
다 치열한 삶의 현장일 터.
산골 부부의 노동과 땀이 깃든
마당과 텃밭 곳곳을 둘러본다.
조금 덜 힘들게, 조금 더 즐겁게
이 현장을 꾸리고 지켜나가자고, 마음을 다잡는다.
‘기름밥 청춘’ 노래가 요 마음에
살살 기름칠을 해 주는 듯하니 왠지 잘할 수 있을 것만 같다.
노래까지 떠오르는 책은, 아무튼 나한테 특별히 더 좋은 책~♪
“아직도 해방은 멀고 멀은데
주저앉아 있을쏘냐
노동에 흘러간 우리 30년
돌아앉아 있을쏘냐
흐린 날 있으면 맑은 날도 오는 법
쏟아지는 폭풍우 속에 당당하게 나서자
기름밥 청춘아~ 구릿빛 환한 웃음
변할 수 없는 우리 맹세로
기름밥 청춘아~ 내일을 노래하자
다시 부를 해방 노래를!”
(기름밥 청춘/ 유인혁 글, 곡/ 꽃다지 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