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의 시간을 그린 김근희, 이담 화가의 설악산 일기
책 속 작가 소개에 따르면
“함께 그림 그리고, 같이 생활하는 가족이자 동지”인 김근희, 이담 화가.
두 사람이 10년 동안 쓰고 그린 <설악산 일기>를 처음 마주한 날,
아주 천천히 보고 느끼며 산의 시간을 마음에 담고 싶었다.
느리게 봐야만 할 책 같았다.
어라, 예상이 빗나갔다.
몇 쪽 넘기고서 덮었다간 금세 뒤돌아서서
다시 책을 둔 자리로 가고 있다.
그림과 이야기가 자꾸만 손짓한다.
더 보고 가라고, 보고 싶은 만큼 보라고, 그래도 된다고.
책이 부르는데 뭘 망설이랴.
얼마 안 걸려 훅~ 마지막 장을 만나고야 말았네.
하루를 여는 시간에도 하루를 닫는 순간에도
<설악산 일기>와 함께할 때면 참 편안하고 아늑했다.
두툼한 책 안에 포근하게 안기는 느낌.
가끔 김근희, 이담 두 화가와 함께
산길을 같이 거니는 기분에 젖으면서
그림 200점과 더불어 390여 쪽에 달하는 설악산 10년의 이야기를,
염치없게도 휘리릭 내 안에 들였다.
순수미술 화가가 바라본 자연은
그림도 글도 순수하게 곱고 어여뻤다.
수채화로 그려낸 이 꽃 저 꽃들은
맑고 고운 몸짓으로 살랑살랑 나에게 인사를 건네는 듯했다.
‘너도 다음엔 나를 찾아보렴’ 하면서.
“작은 레이스 양산을 받쳐 든 것 같은 뚝갈과 마타리는 같은 과라서 모양이 비슷하다. 단지 꽃 색이 달라서 뚝갈은 하얀 양산, 마타리는 노란 양산이다.”(233쪽)
“숲 곳곳에 불쑥불쑥 피어 있는 투구꽃은, 만나는 꽃마다 색깔이 다르다. 청보라 물감에 떨어진 이슬의 농도가 달랐을까? 흰색에 가까운 꽃부터 진보라색까지 넓은 팔레트를 펼친다.” (235쪽)
꽃 자태를 표현한 글귀와 그림을 번갈아 보며 감탄하기도 여러 번.
‘와, 어떻게 저런 표현을 떠올렸을까. 같은 꽃을 보아도 화가의 눈은 그리고
마음까지도 뭔가 달라도 다르구나!^^’
왁스페인팅으로 그린 나무 둥치들은
거칠고도 단단한 자태로, 나무보다 더 나무 같은 모습으로
눈길과 마음까지 꽉 붙잡곤 했다.
나는 단 한 번이라도 이렇게
나뭇결 하나하나 정성껏 들여다본 적 있던가,
저절로 지난 산골살이를 되돌아보게 되더라니.
“하얗게 얼어붙은 계절, 여백 같은 시간에도 나무는 무언가를 하고 있다. 다시 돌아올 봄을 기다리며 겨울눈을 만든다.” (365쪽)
산골짜기에 살아온 지 10년 가까운 시간 동안
나는 ‘순수하게’ 산에 다가서지 못했다.
나물을 하거나 약초를 캐거나
열매를 따거나 산밤을 줍거나.
늘 뭔가를 얻고자 했다.
지리산과 덕유산 그 사이에 살면서,
그 좋은 산에 마실 한번 가지 않고
오로지 ‘산농사’를 위해 앞산 뒷산 옆 산만
오르내린 지난날들이 불쑥 서글펐다.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
아, 이 노래가 절로 흐른다.
“같은 길이라도 올라갈 때 보는 것과 내려올 때 보는 것이 이렇게 다르구나. 세상 일 또한 그럴 것이다. 올려다만 볼 때는 안 될 것 같은 일도, 내려다보면 될 수도 있으니.”(47쪽)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승의 삶이 이런 깔딱 고갯길이라면 나는 이 고개의 어디쯤 왔을까? 이 순간은 힘들어도 한 걸음 두 걸음 오르다 보면 어느덧 산마루가 나오고 시원한 산들바람을 만나겠지. 삶에서 만나는 깔딱 순간마다 산들바람이라는 희망을 기다리며 우리는 길을 오른다.”(50쪽)
<설악산 일기>를 덮으면서
산골살이 10년에 어쩌면 처음으로,
산에 오르고 싶다는 열망이 차올랐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산과 만나는 시간, 산그늘에 폭 안기는 순간.
텃밭 앞에 나지막이 펼쳐진 바로 저 앞산이어도 좋고
높고 깊은 산이라면 아마도 더 좋을 테지.
“우리는 설악산과 사랑에 빠졌나 보다. 자꾸 생각나고, 생각하면 기분이 좋고, 바라보면 더 좋고, 가까이 가고 싶고, 그 안에 있으면 편안하다.” (57쪽)
한껏 아름답고 정말 재미있으며
삶에 도움이 되는 책, <설악산 일기>.
어느덧 이 책을 사랑하게 되었나 보다.
생각하면 기분이 좋고
표지를 바라보기만 해도
이렇게 편안한 웃음이 샘솟으니까.
김근희, 이담 화가가 산에서 배운 ‘공존과 순환’의 법칙이
<설악산 일기>를 징검다리 삼아
우리네 삶에 소중하게 싹 트고 꽃피우기를
아주 많이 바라며 책을 내려놓는다.
가까이에 두어야지, 어느 때건 바로 다가갈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