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했던 삶의 방식을 찾아서
겨울잠에서 깨어나
밭으로 나서야 할 때가 되었다.
아침엔 여전히 서리가 내려앉는 곳.
햇살 내리쬐는 오후를 틈타
이 밭 저 밭 둘러보았다.
새 학기를 앞둔 학생처럼
설렘과 걱정이 오간다.
‘뭐부터 해야 하지?
어디서부터 손대야 하나….’
어쩐다냐, 영판 모르겠다.
지난해 지지난해 계속 머물던 바로 그 땅인데
모든 게 처음 같기만 하다.
졸가리가 영 안 서네.
하릴없이 메마른 풀 어루만지고
촉촉한 흙 뒤적뒤적하다가는,
살랑이는 봄바람 타고
불쑥 다가오는 어떤 깨달음.
‘일머리가 없어도 정말 없구나!
아무리 소박한 농사였어도
땅과 더불어 10년을 살았건만, 쯧쯧.
서당 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데,
아무래도 나는 이 일이 적성에 맞지 않나 봐….’
알고 있었다.
내가 농사일을 참 못한다는 걸.
씨앗 뿌리고 모종 심을 때
김매기 할 때
거두어 갈무리할 때마저도,
정성껏 하면서 기쁨과 보람도 자주 느끼고는 했지만
한결같이 비슷하게 어렵고 막연했다.
자청해서 적성검사를 받아 놓고는
매번 탈락당하는 느낌이랄까.
밭일 앞에서 머리보다 몸이 먼저 움직이는
옆지기 덕분에, 그나마 여기까지 잘 걸어올 수 있었네.
아마 앞으로도 그리될 듯하고.
열심히 하다 보면 언젠간 일머리가 서겠지, 했던
서툰 기대를 이젠 내려놓아야 할 것 같다.
서른 끝자락부터 10년 가까이 받은
적성검사로 충분하지 싶다.
해도 해도 농사가 몸에 붙지 않는 이 현실을,
그런 나를, 다그치기보다는
잘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고
너그럽게 안아주고 싶다.
누구든 그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따스하게 어루만져 주는 저 봄 햇살처럼.
허탈함과 평온함이 뒤섞인 마음 안고
터벅터벅 밭을 빠져나왔다.
집에 돌아와 두툼한 책 세 권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제주의 3년 이하 이주민의 가게들: 원했던 삶의 방식을 일궜는가?>
<서울의 3년 이하 서점들: 솔직히 책이 정말 팔릴 거라 생각했나?>
<서울의 3년 이하 서점들: 책 팔아서 먹고살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제주에 사는 것도 아니요,
서점을 꾸리는 삶도 아닌데
왜 그렇게나 와닿던 내용이던지.
올겨울 이 책들을 마음으로 껴안으며
10년 이하 귀촌자인 스스로에게 여러 번 물어보았다.
“원했던 삶의 방식을 일궜는가,
산골에서 지속가능하게 먹고살 수 있겠는가.”
결코 쉽지 않은 저 물음 앞에서
책 속 이야기들이 작은 실마리를 던져 주었다.
“내게 부족했던 것은 밖으로 내보일 명분이 아니라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아니었나 싶더라. (…) 걱정만 하다가 아무것도 못 하는 사람은 되고 싶지 않았다. 고민보다 결심이 필요하다 판단했다.” (53쪽)
“하루하루 내가 살고 싶은 대로 살 수 있는 자유를 지키는 게 목표다.” (121쪽)
_<서울의 3년 이하 서점들: 솔직히 책이 정말 팔릴 거라 생각했나?>에서
“모두에게 개성이 필요하지 않을까. 이런 식의 삶도 가능하다는 것, 다양한 개인이 다양한 방식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만으로 세상이 조금 더 풍요로워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227쪽)
_<서울의 3년 이하 서점들: 책 팔아서 먹고살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에서
“하고 싶은 일부터 하는 삶이라는 게, 더는 선택의 문제로 여겨지지 않았다. 그렇게 살아야만 하겠더라.” (140쪽)
“포기할 게 있으면 잘 포기하면서, 할 수 있는 범위에서 최선을 다하겠다.” (183쪽)
“새롭게 다가오는 즐거움은 줄어들고, 체감하는 어려움은 커져 가니, 솔직한 마음으로 지치는 게 사실이다. (…) 오히려, 꾸준함에 대한 집착이 사람을 망가뜨릴 수 있다고 본다.” (231쪽)
“너무 힘들면 돌아가면 된다. 나중에 다시 올 수 있다. 잠시 떠났다가 돌아온다고, 누가 뭐라 하지 않는다. 본인에게 맞는 속도와 방향이 가장 중요하다고 본다.” (353쪽)
_<제주의 3년 이하 이주민의 가게들: 원했던 삶의 방식을 일궜는가?>에서
나에게 던진 물음 앞에
앞으로 살아갈 시간들이
차근차근 그 답을 만들어 줄 거라 믿는다.
주관식 문제가 원래
답 쓰기가 어려운 법 아니던가.
다만 어떤 전환점이 필요하다는 것,
그것만큼은 뚜렷하게 느껴진다.
10년이면 강산도 바뀐다는데
산골살이 10년 차를 맞는 나에게도
새로운 변화가 찾아오는 게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 아닐는지.
그 첫 단추를
농사에 적성이 맞지 않는 나를 인정하는 것으로
차근차근 꿰어 보고 싶다.
신중하되 심각해지지는 않으면서.
밭일에 소질이 꽝인 나지만
땅과 더불어 지낼 수 있는 이 삶이
고맙고 행복했다.
이 마음만큼은 10년 동안
나를 떠난 적이 없다.
그 시간들이 앞으로 다가올 날들을
지탱하고 이끌어 주리라 든든히 믿는다.
날이 따스워지니
트랙터, 경운기 오가는 소리가
날마다 이어진다.
온몸 안 아프신 데가 없으면서도
농사 앞에 언제나 진심이고 열심인
마을 농부님들을 응원하고 존경하면서
철 따라 내 앞에 다가온 일을
이젠 정말로 시작해 보련다.
감자밭 매기부터!
일어나자, 소중하고 귀중한 흙을 만나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