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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골짜기 혜원 Mar 23. 2018

1년을 기다린 만남, 두근두근 햇된장

묵은장은 가고, 새 ‘된장’의 시대가 열렸다!


마음 깊이 그리워하던 사람을 일 년 만에 만나게 된다면, 어떤 마음이 들까. 그것도 그 사람을 만나기 전 십 센티미터 앞이라면…. 


지난해 봄, 장 가르기 한 뒤로 뚜껑 한번 제대로 열어 보지 않았던 된장 독. 드디어 그 뚜껑을 열기로 한 날, '묵은장'의 시대를 보내고 새 '장'의 시대를 맞이하던 날, 장독 곁으로 다가서는 마음이 무척이나 떨렸다. 마치 오랜만에 옛사랑이라도 만나는 것처럼. 이것은 설렘인가, 두려움인가…. 정체를 알 수 없이 파닥이는 마음을 안고 가끔 닦아 주기만 했던 장독 뚜껑을 열고야 말았다! 


드디어 햇된장을 만나는 날, 장독 곁으로 다가서는 마음이 무척이나 떨렸다.


때깔은 그럭저럭 된장 같아 보인다. 맨 위에 두껍게 쳤던 소금도 조금 남아 있고. 나무 주걱으로 가운데를 푹 찌른다. 속살이 드러난다. 윗부분이 보여 준 진한 빛깔과는 한참 다르다. 어찌나 밝던지, 마치 갓 만든 메주 때깔처럼. 아직 숙성이 덜 됐나? 손가락 끝으로 살짝 찍어 입에 넣어 본다. 음…. 짭짤하니 괜찮은 것도 같고, 뭔 맛인지 모를 듯도 하고. 국이든 찌개든 끓여 먹어 봐야만 잘된 건지 아닌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묵은장 담아 먹던 그릇에 몇 주걱 뜨고는 바로 냉이된장국 끓이기. 햇된장 맛 생생히 느껴본답시고 번연히 있는 맛국물도 넣지 않고 마늘, 파도 제꼈다. 된장을 적당히 넣었건만 국물이 멀겋게 맑다. 으깨지지 않은 메주콩 알갱이도 눈에 띈다. 메주 만들 때 덜 찧은 티가 이렇게 나타나는군. 


햇된장으로 첫 된장국을 끓인다. 어떤 맛일까, 너무 너무 궁금해.
맛국물, 파, 마늘 다 제끼고 햇된장만 넣고 끓인 냉이된장국. 


된장과 물과 냉이만 넣고 끓인 진정한 천연 된장국, 그 맛은? 아쉽게도 뭔가 밋밋했다. 맛국물도 마늘과 파도 없어서인가, 된장 맛이 덜 들어서인가, 아니면 햇된장 맛이 다 이렇고 이런가…. 지난해 먹었던 햇된장 맛이, 때깔이 조금도 떠오르지 않는다. 왜 나는 겪은 일들을 이다지도 기억해 내지 못하는지. 어쩔 수 없지. 다시 끓여 보는 수밖에. 


멀겋게 맑은 천연 된장국 맛은? 조금 밋밋했다. 묵은장이 슬쩍 그리워지네.

늘 하던 대로 맛국물부터 마늘, 파 다 챙겨 넣고 햇된장으로 세 번쯤 더 국을 끓였다. 냉이된장국, 달래된장국, 다시 또 냉잇국. (된장찌개를 끓이고 싶은데 밭을 매다 보니 자꾸만 냉이가 생겨서 어쩔 수 없이 냉잇국을 먹고 또 먹는다.) 


산뜻하니 맛있긴 한데 국물이 멀개서 된장 맛인지, 맛국물 맛인지 자꾸 헷갈린다. 그리고 그리워진다. 진득하게 진한 빛깔에서 우러나던 깊은 된장 맛. 



아차차! 묵은 된장이랑 햇된장을 섞어 먹으면 산뜻하고도 진한 맛 어우러진 국물 맛을 낼 수 있겠구나. 왜 미처 그 생각을 못했지? 묵은 된장은 있는 족족 먹어서 거의 없는데 이제와 어찌한담. 김장 김치만 해도 삼 년 묵은지, 이년 묵은지 고루 갖춰 놓고 있으면서 어쩌자고 된장은 그리 쟁여 놀 생각을 못했는지. 그저 단순무식하게, 먹던 된장 독 다 비워야 그다음에 만든 된장을 먹는다고 생각했으니. 쯧쯧. 


묵은장(왼쪽)과 햇된장(오른쪽) 때깔이 어쩜 이리 다른지!


어쩔 수 없이 이제부턴 요 밝은 빛깔로 말간 국물 만들어 내는 새 된장과 지내야 하나니. 손님들 찾아오면 된장찌개만큼은 자신 있게 끓여주었는데, 햇된장은 아직 그 맛이 사람들에게도 맞을지 어쩔지 감을 못 잡겠으니 이를 어쩐다. 새봄을 맞아 새로운 ‘장’의 시대를 열었는데, 이 ‘장’이 올 한 해 맛나게 펼쳐질 수 있을지 좀 더 두고 봐야 알 것 같다. 


소리 없이 익어가는 장독 지긋이 바라보던 지난 일 년,  소리 없이 행복했다. 


그래도 일 년을 기다린 만남인데, 것도 우리 집 손맛 책임지는 ‘된장’님과 만난 것인데. 만나기 전 설레고도 두려웠던 그 마음부터, 만나고 나서 긴가민가 복잡한 이 마음까지 모두 ‘행복’한 마음인 것만큼은 분명하다. 


아, 그보단…. 소리 없이 익어 가는 장독 지긋이 바라보던 지난 일 년, 소리 없이 죽 행복했노라고, 묵은장님이 든든히 곁을 지켜 주고 있을 때도 나는 늘 님을 그리워했노라고, 일 년 만에 만난 햇된장님께 부끄러운 고백을 하고만 싶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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