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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골짜기 혜원 Mar 27. 2018

미세먼지 마스크 대신
텃밭이 키운 도라지차

삽질하고, 밭도 매고, 기관지에 좋은 도라지차도 마시고….

봄 텃밭에 때 아닌 삽질 잔치가 벌어졌다. 지난해 가을, 먹을 만큼 거둔 뒤로 겨우내 꽁꽁 언 땅속에 고이 놔둔 도라지들. 봄이 오고, 땅이 녹으니 잘 있는지 궁금한 나머지 삽을 들고 도라지밭으로 나섰다.


땅속 깊숙이 박힌 도라지들을 세상 밖으로 끌어내고자 삽질 시작. 도라지는 호미로 캘 수 없는 묵직한 존재일지니. 밭에서 하는 삽질 처음인데, 글쎄 삽질이 되네. 그것도 꽤 괜찮게! 그동안 옆지기가 하는 모습 어깨너머로 슬쩍슬쩍 엿본 게 쓸모가 있었나 봐. 살면서 숱하게 했던 인생 삽질은 별 쓸모없었을 테지만. 


밭에서 하는 삽질 처음인데, 삽질이 되네? 보일 듯 말 듯 올라오는 도라지 엿보는 짜릿함은 덤으로!


삽을 땅속에 푹 밀어 넣고는 지렛대 원리로 삽 언저리를 발로 눌러주면 흙무더기가 위로 쑥 올라온다. 손맛에 발 맛까지 짜릿하기 이를 데 없다. 생전 처음 삽질한다는 산골새댁, “재밌다!” 소리를 연신 외치더니 도라지밭 반 너머 끝장내는 신공을 발휘기에 이르고.

 

어디 삽질만 재미난가. 땅 위로 보일 듯 말 듯 비치는 도라지 뿌리를 조심조심 꺼내 온전한 도라지 때깔을 마주할 때면, ‘노다지를 캐도 이보다 기쁠까?’ 하는 생각이 절로 일어난다. 굵은 몸통에 달린 잔뿌리가 어찌나 많은지. 그 자태는 마치 산신령 수염 같기도 해서, 보는 것만으로도 영험한 기운에 휩싸인다. 산 밑에서 자랐으니 정말로 산신령 기운이 스몄을지도 모를 일이겠지? 


"도라지 도라지, 백도라지~ 한두 뿌리만 캐어도 노란 바구니 철철 넘친다~"


한 시간쯤 삽질 끝에 은은한 지조가 느껴지는, 흙 빛깔만 깨끗이 남은 도라지밭이 보이고. 그 옆에는 노란 바구니 그득한 도라지가 내 눈을 환히 비춘다. 도라지도 캐고, 김도 매고. 새봄을 맞아 감자밭에 저절로 난 냉이 캐기에 이어, 김도 매고 도라지 수확도 하는 일석이조 밭일, 또 한 번 이루어졌도다! 


잔뿌리 가득한 저 도라지, 팔려고 키우는 거면 상품가치가 없을 테지만 우리 집선 귀하신 몸. 잔뿌리 하나하나 떼어 내서, 박박 씻어, 햇볕에 바싹 말리면 귀한 도라지차 재료 되시나니. 노란 바구니 그득 넘쳐나던 도라지들이 잔뿌리 사라진 뒤로 부피가 엄청 줄었다. 그래도 이거면 충분해. 도라지 껍질 까기가 또 얼마나 힘든데, 요것만 해도 한참 걸리겠어.

 

산신령 수염 같은 잔뿌리를 죄 떼어내니, 몸통만 남은 도라지 부피가 폭 줄었다.


생애 첫 삽질로 도라지밭 반 이랑 깨끗이 다듬은 날, 도라지 잔뿌리도 말끔히 다듬은 날. 누군가에게 참 미안하고 부끄럽던 마음도 조금이나마 다듬어 본다. 그러면서 깨닫는다. 채소밭도 마음밭도, 뭔가를 심기는 쉬워도 그 밭에 들어서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잡초를, 잡초 같은 마음을 뽑아내기가 참 쉽지 않다는 걸. (누군가 <잡초는 없다>라는 책도 썼다지만 어디가 그래, 밭에도 마음에도 잡초는 있다니까!) 


농사를 하자면 밭매기는 꼭 해야만 하는 일. 뿌리가 깊은 놈들일수록 더더욱 빨리 뽑아내야만 밭이 제 몫을 할 수 있고. 도라지밭 삽질도 생전 처음 해보았으니 마음밭 삽질도 슬슬 도전해 볼까?


‘먹기 위해 사는 것도 아닌데….’ 도라지 다듬기는 너무 힘들어  

삽질 자랑차게 캐놓기만 하고 다듬지 못한 도라지에 자꾸만 마음이 간다. 흙 떨군다고 한 차례 씻어둔지라 조금씩 시들해지는 모습이 눈에 밟힌다. 


물에 불어 퉁퉁해진 손가락 애처롭게 바라보며, 두 시간 반도 넘게 손을 놀려 도라지를 다듬기었다.


그렇게 시작한 도라지 다듬기. 시작은 창대했으나 한 시간 넘어가는 때부터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드는 얄팍한 감정. ‘아, 내가 이 짓을 꼭 해야 하나. 먹기 위해 사는 것도 아닌데….’ 쓸데없이 밀려드는 마음과 살짝 씨름하며, 물에 불어 퉁퉁해진 손가락 애처롭게 바라보며, 두 시간 반도 넘게 손을 놀려 도라지 다듬기를 마쳤다. 껍질을 벗고 새하얗게 드러난 고운 도라지들을 보고 있자니, 얄팍한 마음은 어느새 반성하는 분위기로 젖어든다. 


‘추우나 더우나,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몇 년 동안 땅속에서 꿋꿋하게 자란 도라지들인데. 그 긴 시간에 견주면 고작 두 시간 노동은 당연하다 못해 너무 모자란 거 아냐?’


껍질 덜어낸 도라지 빛깔이 곱게 하얗다.


단 한순간 사람 입에 들어갈 그날을 기다리며(어쩌면 그 입에 들어가지도 못한 채 땅속에서 썩어버릴 수도 있는데), 봄이면 꽃 피우고 가을이면 씨까지 남기며 길고 긴 시간 기다려 준 도라지들한테 왠지 부끄럽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어느 때보다 더 고마운 마음으로 도라지 무침을 만들었다. 


날 도라지 바로 먹어도 담백하고 달큰하고, 초고추장에 무친 도라지무침은 새콤달콤한 맛이 일품!


날로 먹어도 담백하게 달큰한 맛이 나는 도라지. 초고추장에 옅게 무쳐내니 새콤달콤한 그 맛에 푹 빠져든다. 어쩜, 도라지가 하나도 안 쓰네. 시장에서 파는 건 소금에 마구 치대야 쓴맛이 줄어들던데. 이 행복한 맛만으로도 두 시간 넘는 노동은 할 만한 일인 게야. 도라지 다듬던 손만큼은 로션 들입다 발라도 꺼끌꺼끌하다만 그래도 괜찮아. 좋은 먹을거리는 쉽게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니까. 

  

미세먼지 방독면 대신, 텃밭이 키운 '도라지차'를 마신다

도라지 몸통에 버금갈 만큼 많았던 잔뿌리 싹 다듬어 햇볕에 맡겼다. 봄기운 흠뻑 받자와 어느덧 바삭하게 말랐네. 손대면 부러질 듯 잘 마른 도라지 뿌리가 참 곱다. 햇볕에 그을린 때깔도 은근하게 멋지고. 


도라지 잔뿌리 싹 다듬어 햇볕에 맡긴다.
햇볕에 그을은 도라지뿌리 때깔이 은근하게 멋지다.


잘 마른 도라지 뿌리랑 장에서 사 온 대추랑 같이 큰 주전자에 넣고 은근하게 끓인다. 구수한 내음이 부엌에 가득 넘친다. 약한 불로 오래 끓인 도라지차. 말갛게 노란 빛깔이 난다. 따뜻한 도라지차 한 모금 들이키니 대추 덕분인가, 달달하고 그윽하니 맛이 참 좋다. 


요즘 미세먼지 때문에 난리라더니 내가 사는 산골 마을도 하늘이 흐릿하기만 하다. 아니나 다를까, 바깥에서 뭘 좀 하다 보면 목이 칼칼하고 재채기도 자꾸 나온다. 눈이 시릴 만큼 아름답게 푸르던 하늘을 잿빛으로 물들인 미세먼지. 산골이 이런데 서울 같은 대도시는 얼마나 심각할지 걱정이다, 정말.

잘 마른 도라지 뿌리랑 대추를 커다란 주전자에 끓이니,  말갛게 노란 빛깔이 나고 맛도 그윽하니 좋다.

 

일기예보에서는 바깥에 나가지 말거나, 꼭 나가야 하면 되도록 입마개를 쓰라고 한다. 방독면 쓰고 다니는 사람도 많다나 뭐라나. 화창한 봄날, 산골 텃밭에 김매고, 씨 뿌릴 일 잔뜩 널려 있는데 집 안에만 머물 수도 없고. 고작 마당에 나가면서 입마개 하는 것도 그렇고. 어쩔 수 없지. 도라지차라도 열심히 마시는 수밖에. 


들은 풍월에 도라지 잔뿌리에는 사포닌과 식이섬유가 풍부해서 기관지를 튼튼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된단다. 내가 또 그 효능을 몸소 체험한 바가 있지. 몇 년 전 기관지가 안 좋아 병원신세를 진 적이 있는데, 어느 순간부터 의사 말 안 듣고 병원도 약도 딱 끊었더랬다. 약도 먹기 싫고 병원도 가기 싫어서. 그리고 또 밭에서 난 도라지를 믿고. 시간이 약이 된 걸 수도 있지만, 약 대신 도라지 뿌리로 만든 차를 마시면서 더는 기관지가 아파 병원에도 약국에도 가는 일은 생기지 않았다. 


시린 겨울을 두 번, 세 번 이겨낸, 산골 텃밭에서 자란 삼 년 묵은 도라지.


시린 겨울을 두 번, 세 번 이겨낸, 산골 텃밭에서 자란 삼 년 묵은 도라지. 목구멍 타고 내 몸 구석구석에 찾아가 미세먼지 거르는 마스크 노릇 톡톡히 해줄 거라 믿으며, 은근하게 쌉쌀하고 슬그머니 달짝지근한 도라지차를 마저 죽 들이킨다. 오늘부터 물 대신 요 도라지차를 마셔야지. 내 몸을 지켜줄 도라지차가 있으니 제 아무리 자욱한 미세먼지 따위, 나는 두렵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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