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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골짜기 혜원 Mar 28. 2018

다섯 시간을 준비한,
눈물겨운 감자전(傳)

‘길쭉 삐쭉 쪼글쪼글’ 텃밭 감자, 못생겨도 맛은 좋아

‘점심 반찬으로 감자조림을 해 볼까.’ 


다용도실에 있는 감자 상자를 열었다가 나를 향해 우르르 튀어나오는 굵고 통통한 감자 싹에 그만 깜짝 놀랐다. 그동안 두 번이나 싹을 없앴는데도 안 본 사이에 이렇게나 자라다니! 작디작은 감자에서 튀어나온 싹을 보면서, 특히나 싹에 맺힌 어린 감자 열매를 보면서는 탄성이 절로 터진다. 


“위대하고 위대하도다. 감자여, 싹이여, 그리고 생. 명. 이. 여!”


나를 향해 우르르 튀어나오는 감자 싹들의 놀라운 향연!
이럴 수가! 감자 싹에 어린 감자 열매가 맺혔다. 

식물의 번식 본능은 그 끝이 과연 어디인지. 물 한 방울, 빛 한 줄기 없는 상자 안에서 싹을 틔우고 기르느라 제 몸은 물렁하고 쪼글쪼글하나, 싹은 정말 탱글탱글하고 싱싱하다. 


감자 처지에서는 있는 힘껏 번식하고자 노력을 기울인 거고, 사람 중심으로 보자면 영양분이 줄어 맛이 덜한 감자가 됐겠지. 


저온저장고가 없고, 창고에 두면 얼고, 겨울을 맞아 어쩔 수 없이 영상 10도 넘는 집 안 다용도실에 보관했고. 그랬으면 자주 살펴서 싹을 없애야 했는데….  불쑥 튀어나온 감자 싹에 놀란 가슴, 감자조림 하려던 맘을 접는다. 은은한 보랏빛이 참말로 곱디고운 싹들을 한숨에 잘라낼 엄두가 나지 않기에. 


감자 상자를 닫으며 밀려오는 궁금증. 


왜, 어떻게, 작은 감자가 큰 감자보다 더 길고 굵은 싹을 틔우게 될까?
분명 영양분은 큰 감자에 많을 텐데.
없이 사는 사람이 있는 사람보다 더 열심히, 힘들게 살아야 하고,
그럼에도 결국 쭈글쭈글 주름 가득한 삶은 없는 사람 몫이 되고야 마는, 
우리네 현실과 통하는 이 느낌은 뭔지….


다용도실에 둔 감자 상자를 차례차례 여니, 굵은 감자일수록 싹이 덜 났다. 왜  그럴까?


여하튼 먹으려고 기르고, 거두고, 나름 고이 보관해둔 것이니 저 싹을 없애긴 해야겠다. 저러다 감자 몸이 사라져 버릴지도 모르니. 자식한테 있는 거 없는 거 다 내어주고 조금씩 사그라지는 우리네 부모님 삶처럼….


‘수염인 듯 뿔인 듯’ 감자 싹들의 재미난 향연!


냉장고에 빈틈이 생겼다! 다용도실에 모셔 둔 감자를 드디어 냉장실로 들일 수 있게 된 것. 


감자 담은 상자를 여니 여지없이 튀어나오는 놀라운 싹들의 잔치! 사과를 감자랑 같이 두면 싹이 덜 난다기에 귀한 장수사과를 넣었건만 그다지 소용이 없네. 수염인 듯 뿔인 듯, 감자를 뚫고 튀어나온 싹 모습이 재미나다. 매실 진액 거른 뒤에 남은 매실처럼 한껏 쭈글쭈글 쪼글쪼글한 감자도, 길쭉 삐쭉 삐져나온 싹도 모두 장하고 예쁘기만 하다.  


사과를 같이 넣으면 싹이 덜 난다기에 귀한 장수사과를 함께 넣었거만 별 소용이 없네. 


이젠 정말 감자 싹을 없애야지. 하나 뚝, 두 개 뚝뚝, 어떤 건 와드득 잡아 뜯기. 그러다 어느 순간 마음 한끝이 찌릿하더니 눈물마저 핑 돈다. 저 작은 감자알보다 열 배도 훨씬 더 길고, 크게 뻗어 나온 싹, 작은 싹에 맺힌 동글동글 어린 감자 열매들…. 


메마른 상자 안에서, 제 몸을 땅 삼아 싹을 내고 열매를 맺은 이 작디작은 감자들의 질기고 질긴 생명력! 감자야, 너희들은 대체 무엇이기에 이토록 진하게, 끈덕지게 생명을 그리고 삶을 이어가고자 하느냐. 감자들을 매만지며 자꾸만 묻는다. 스스로에게도 감자한테도. 그러면서 뭉게뭉게 피어나는 생각, 생각. 


저 작은 감자알보다 열 배도 훨씬 더 길고, 크게 뻗어 나온 싹을 보며 가슴이 저릿하다.
감자야, 너희들은 대체 무엇이기에 이토록 진하게, 끈덕지게 생명을 그리고 삶을 이어가고자 하느냐….


감자처럼, 감자같이 살아간다는 게 어떤 건지 잘 모르지만
그래도 감자처럼, 감자같이 살아보고 싶어.
어찌 됐든, 요 작디작은 감자들 꼭 다 먹고야 말겠어.
그렇게라도 감자가 지닌 생명의 힘을 몸에, 마음에 고이 담아둘 거야.
혹여 손질하기 번거롭다고 외면해버리면,
여기까지 애써 살아낸 감자들한테 너무 미안할 것 같으니까.

위대한 생명의 싹들, 미안스러운 맘으로 죄 떼어놓고 남은 감자들만 모으니 큰 비닐 가득이다. 땅에서 나온 지 9개월여 만에 냉장 보관에 들어간 이 감자들, 더는 싹이 나지 않으려나. 싹이 나지 않는, 싹을 내지 못하는 감자. 더 쪼글쪼글해질 일은 없겠지만 그건 곧 생명의 힘이 떨어진 감자라는 말과 같은 건 아닐는지. 그렇다면 냉장고는 ‘신선한 보관’이 아니라 생명을 조금씩 ‘죽이는 공간’이 될 수도 있을까? 모르겠다. 더 놔두면 음식을 할 수 없을 지경이 될 수 있다는 것만큼은 알 것도 같으나.  


감자 싹 죄 떼어낸 감자를 빈틈이 생긴 냉장고에 옮겼다.


그저 어쩔 수 없이 냉장고를 차지한 이 감자들, 하지 감자 나오기 전까지 잘 먹어 보련다. 겉모습은 못생겼지만 감자볶음을 해도 된장찌개를 해도 내 입엔 맛만 있으니깐. 


다섯 시간을 준비한, 눈물겨운 감자전(煎)? 감자전(傳)! 


오로지, 직접 기른 감자를 버리지 않겠다는 생각 하나로 감자전을 만들었다. 무려 다섯 시간에 걸쳐서! 


다용도실에서 냉장고로 자리를 옮긴 감자를 하나씩 꺼내 먹던 어느 날, 보고야 말았다. 검게 얼어 썩고 있는 감자, 감자. 다용도실에 있을 땐 적어도 썩는 일은 없었는데 냉장고가 그리 추웠을까? 밖으로 내놓기엔 어차피 늦었다. 그랬다간 죄다 물러 터질 게 빤하니까. 


안 그래도 작은 감자들. 껍질 까기도 힘들건만 썩은 곳까지 도려내며 먹자니 어찌나 번거롭고 힘들던지.


그 뒤로 냉장고에서 감자를 꺼낼 때마다 싹 버리고픈 열망에 한 번씩 휘둘리곤 했다. 안 그래도 작은 감자들. 껍질 까기도 힘들건만 검게 썩은 곳까지 도려내며 먹자니 어찌나 번거롭고 힘들던지. 썩은 자리 빼면 먹을 게 얼마 남지 않기도 했고. 그래도 차마, 차마 버릴 수 없어서 꾸역꾸역 찌개도 하고 볶음도 해 먹다가 결심을 했다. 모든 감자 한 번에 끝장낼 먹을거리를 하자! 무엇으로? 카레랑 감자전이 공동 후보에 올랐는데 고심 끝에 감자전이 간택되었다. 


하나하나 다듬기 시작. 버리는 게 더 많기는 했지만 어느 정도 섭섭지 않게 하얀 속살을 건질 수 있었다. 조각조각 난 감자들. 강판에 갈기엔 너무 작으니 믹서로 ‘윙윙.’ 물 쪼금씩만 넣고 돌리니 고것도 시간 꽤 걸린다. 


그 많은 얼고 썩은 감자들을 서너 시간 걸려 모조리 다듬었다! 


믹서에 다 갈고, 베 헝겊에 건더기를 거르니 감자에서 빠져나온 검붉은 물이 꽤 많다. 감자전 말고 다른 요리를 했으면 저 물도 다 먹는 걸 텐데. 좀 아깝지만 버리는 수밖에. 검붉은 물 밑에 가라앉은 하얀 감자전분이랑 감자 건더기를 합친 뒤에 소금 솔솔 쳐서 반죽을 한다. 다듬기부터 반죽까지 하는 데만 무려 다섯 시간이나 걸렸다! 


고생 끝 행복이나니 이젠 먹는 시간. 걸쭉하고 퍽퍽한 감자 반죽. 부침 모양이 나올까 싶었는데, 된다. 것도 아주 차지게 잘 부쳐진다. 노릇노릇 익은 감자전. 담담하게 맛을 본다. 적당히 고소하고 쫄깃하면서 질펀하게 담백한 맛. 삶은 감자, 볶음 감자, 조림 감자, 카레 감자, 찌개 감자…. 내가 좋아하는 감자 요리들과는 또 다른, 감자전만이 지닌 새로운 감자 맛 세계를 만난다. 


검붉은 물 밑에 가라앉은 하얀 감자전분이랑 감자 건더기를 합친 뒤에 소금 솔솔 쳐서 반죽을 한다.


밀가루를 넣으면 어떨까? 궁금해서 조금 섞어 보는데 때깔부터 허연 쪽으로 기운다. 맛을 보니 쫄깃함도 덜하고. 아무래도 감자전은 좀 어둑어둑한 색이어야 감자전답지. 밀가루는 감자전 본질을 흐리는 듯하여 넣지 않기로 결정! 부치고 먹고, 또 부치고 먹고. 배부를 때가 됐는데 자꾸 손이 간다. 기름 두른 거니 느끼할 법도 한데 계속 먹는다. 결국 감자전으로 저녁을 대신했나니. 


백 퍼센트 감자로만 만든 감자전(왼쪽)과 밀가루 살짝 섞은 감자전(오른쪽)은 때깔도 맛도 다르다.


귀하고 맛난 감자전을 기연히 만들어 내서 행복한 날. 땅이 내준 감자 절대로 버리지 않고 먹겠다던 의지를 실천에 옮긴 뿌듯한 날. 지난여름 텃밭에서 태어난 마지막 감자들과 씨름하며 눈물겨운 감자전 만들고 먹은 덕에, 이제부턴 큰 감자로 편하고 쉽게 감자 반찬 해 먹을 수 있게 됐다. 보관 잘 못한 죄가 나한테 있는지라 그동안 말은 못 했다만 감자야, 그동안 너 챙겨 먹느라 나도 고생 많았단다. 올해 농사지을 감자는 고이 갈무리해서 썩히지 않고 잘 먹도록 할게. 


그러고 보니 봄이 오면 가장 먼저 하는 농사일이 감자밭 김매고, 감자 심는 거였구나! 쪼글쪼글하건 탱글탱글하건, 땅과 자연 힘 그대로 묻어나는 텃밭 감자가 나는야 언제나 좋다. 그러니 내일은 감자밭을 기필코 매야만 하겠다. 3월이 가기 전에 감자를 심어야만 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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