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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골짜기 혜원 Feb 12. 2018

고드름 먹고, 고라니도 만나는
산골짜기 작은 겨울왕국

‘무주-진안-장수’에 드는 장수답게 '무진~장' 눈이 옵니다! 

아침에 눈 뜨니 온 세상이 하얗다. 오랜만에 보는 눈. 반갑게 맞이하려다, 허걱! 눈보라가 휘날리고, 어느새 두텁게 쌓인 눈 더미. 마당 나갈 때도 장화를 신어야만 한다.


‘출근길 교통 주의, 농작물 관리 유의.’ 전라북도청에서 대설주의보 안내 문자가 몇 번이나 날라 온다. 마을 방송도 두 번이나 울려 퍼지고. 눈 많이 오니 내 집 앞 쓸고 어쩌고저쩌고. 드디어 눈 많다는 ‘무주-진안-장수’에 드는 장수답게 ‘무진~장’ 눈이 올 태세인가 보다. 가장 먼저! 오늘 택배 보낸다던 언니한테 전화부터 걸어야지. 그 택배 오늘내일은 보내지 말아 달라고. 이 정도 눈이면 택배 기사님 예까지 못 오실 듯하여. 오시더라도 너무 고생하실까 걱정되어. 


아침에 눈 뜨니 온 세상이 하얗다.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모습이 무진장 눈이 올 테세다.


점심 즈음 잠시 해도 나고 눈도 슬쩍 녹는 듯하더니 다시금 눈이 온다. 내일도 모레도 계속 온단다. 집 앞 눈 열심히 치웠는데 내일이면 또다시 눈이 쌓일 테지. 그러면 또 치워야할 테고. 깊은 산골은 아니지만 당분간 고립(?)된 생활을 해야 할 듯. 물론, 무리해서 나갈 순 있지. 큰길까지만 가면 어찌 될 듯도 하니까. 그래도 이 정도 눈이면 산골 큰길도 좀 걱정되긴 한다. 냉장고에 막걸리 두 병뿐인 게 좀 걸리지만 소주가 있으니 뭐 괜찮을 거야. 라면도 넉넉하고. 


온통 새하얀 눈 속에서도 대나무는 푸르르기만 하다.


문득 산골짜기에 터를 잡은 첫 해, 마을 분들이 하도 눈 많다고 겁을 주셔서 겨울 되자마자 라면 세 상자나 샀던 기억이 나네. 그 라면 다 먹느라 고생 좀 했지. 그 뒤로도 고립될 만큼 눈이 많이 온 적 잘 없어서 슬쩍 아쉽기도 했는데 제대로 퍼붓는 이번 눈이 은근 반갑다. 


그나저나 내일 치과 예약인데, 한 달도 훨씬 더 전에 잡힌 건데, 간만에 산골 벗어날 나들이(?) 건인데, 아무래도 이 눈보라 뚫고 가긴 어렵겠지? 산골 겨울은 눈님 기분 따라 하루하루가 오락가락해. 그래도 장수답게 무진장 내리는 눈이 아직까진 반갑다. 나야 뭐, 농작물 관리할 것도 없고, 출근할 일도 없으니까. 내일 아침도 눈님이 세게 머물고 계시면 치과 예약 미루는 전화를 걸고, 눈 좀 치우면서  소박한 산골 방콕은 흘러갈 테지. 쌓이는 눈처럼 소리 없이 조용히…. 


 “왝, 왝!” 고라니 소리다! 

눈 소복이 덮인 마당 앞 텃밭. 작은 사과나무 너머로 밭 몸매가 고대로 드러난 모습이 참 고와서 날도 추운데 자꾸만 마당으로 나간다. 헌데 눈 잔뜩 덮인 마을길. 보기만 해도 한숨부터 푹 나온다. 내 집 앞이 어디까진지 알 도리 없고 눈에 보이는 눈, 되는 대로 민다. 밀어야 밀리지 않는다! 그래도 차 다닐 만큼은 길이 열린 듯해  뿌듯하고 개운하게 돌아선 뒤로는 다시 쳐다보지 않는다. 


눈에 보이는 눈, 되는 대로 민다. 밀어야 밀리지 않는다!


다시 마당. 낮에 아주 잠시 해가 났다고 처마 끝에 길쭉길쭉 고드름이 열렸다. 우와~ 저렇게 큰 고드름은 처음이야! 똑 따서 딱 한 입만 먹는다. 지붕 재료가 썩 좋은 게 아니어선. 나무 집이나 초가집이었음, 얼음과자처럼 아작아작 끝까지 맛나게 먹었을 텐데. 고드름 뚝 끊어지는 손맛이 무지 짜릿해서 가장 긴 놈으로 다시 뚝! 손에 쥐고 혼자 지팡이 놀이를 해본다. 손이 시려서 오래 붙잡진 못했지만 재미나다.  


긴 고드름 쥐고 지팡이 놀이중~


그러다 가까이서 들리는 소리. “왝, 왝!” 고라니 소리다! 앞산을 바라보니 고라니가 산등성이 타고 쏜살같이 달리고 있다. 그리고 금세 저 너머로 사라졌다. 바람처럼 왔다간 고라니가 그립고도 애틋하다. 유독 겨울이면 대낮에도 모습을 보이는 고라니, 이 추운 겨울 무얼 먹고 살까. 산도 눈이 많이 쌓였을 텐데, 먹을 물도 꽁꽁 얼었을 텐데, 옹달샘이라도 찾아 잠시 내려왔던 걸까?    


눈 쓸고 고드름 먹고 고라니도 만나고. 큰눈 내린 하루 만에 겪은 일이 꽤나 많다. 온통 새하얀 산골짜기가 작은 겨울왕국처럼 다가온다. 그러니 눈 쏟아진다고 방에만 있지 말자, 내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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