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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골짜기 혜원 Oct 02. 2018

산골 작가에서 편집자로
행복한 이중생활(?)

남북 평화 앞당길 책 <남과 북 아이들에겐 철조망이 없다>를 만든 이야기

산골 혜원 이름으로 나온 책, <이렇게 웃고 살아도 되나>가 세상에 얼굴을 내민 뒤로 얼마 흐르지 않은 지난 5월 어느 날. 생전 처음 ‘작가’라는 이야기를 들으며 마냥 들떠 있던 저에게 한 편의 글이 슬며시 다가왔습니다. 작가가 아니라 편집자로서 매만져야 할 원고였지요.  


사실은요, 책 한 권 냈다고 살림살이에 그다지 보탬이 되지는 않아요. 저 같은 초짜 저자는 더더욱 그렇죠. 그동안 산골살림을 지탱해 준 힘도 바로 간간이 찾아드는 편집 프리랜서 일거리 덕분이었고요. 그렇기에 <이렇게 웃고 살아도 되나>를 여기저기 알린답시고 정신없이 바쁜 때였음에도 소중하게 다가온 이 일감을 냉큼 고맙게 받아 안았습니다. 책을 펴낸 ‘작가’에서 책을 만드는 ‘편집자’로, 마치 순간 이동처럼 불쑥 뒤바뀐 행복한 이중생활(?)은 그때부터 한여름 내내 이 가을까지도 죽 이어졌답니다. 


책을 펴낸 ‘작가’와 책을 만드는 ‘편집자’ 사이를 오가는 행복한 이중생활(?)을 안겨 준 소중한 책, 이기범 작가의 <남과 북 아이들에겐 철조망이 없다>.

이 원고를 처음으로 받았을 때가 생각납니다. 책이 되어 세상에 나오기 전, 작가의 혼이 서린 글과 첫 독자로서 맞대면하는 순간입니다. 주르륵 읽고 난 뒤에 참 많이 놀랐습니다. 


한길을 따라 아무리 힘겨워도 걷고 또 걸으며 살아가는 분들 더러더러 알고는 있지만 이 글을 쓴 작가의 삶은 그와는 또 다른,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찌릿한 감동이 있었거든요. 더구나 처음 엿보는 북녘 사람들의 이야기는 어찌나 재밌고 짜릿하던지 혼자 깔깔대다가는 어느 순간 가슴이 시릿해져서 혼자 뭉클한 마음 살살 쓸어내리기도 했어요. 


하지만, 마냥 감동에 젖어 있을 수만은 없지요. 제 본분은 책을 만드는 편집자! 독자들을 위해 조금이라도 더 재밌고 알찬 구성을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북녘 사정에 어두운지라 작가한테 전화로, 전자우편으로 끊임없이 묻고 또 물었답니다.

산골에 살면서 편집 일을 하다 보니 직접 작가를 만나기가 쉽지 않았어요. 편집을 시작할 때 첫인사를 나눈 뒤로는 거의 전자우편으로 소통을 했답니다. 


만나지 않고 글로만 마음을 전하다 보니 더러 실수도 생기고 아쉬운 부분들도 많았을 텐데 언제나 너그럽게 받아 주는 작가한테 늘 고마운 마음이었죠. 


 

‘지원’을 ‘협력’으로, ‘설득’을 ‘설명’으로, ‘할당량’을 ‘책임량’으로, ‘호소’를 ‘요청’으로, ‘촉구’를 ‘요구’로, ‘여전히’를 ‘아직’으로, ‘교류를 할 수 없으므로’를 ‘교류가 없으므로’로, ‘현격하다’를 ‘있었다’로…. 


오랜 시간 공들여 쓴 첫 원고를 편집자 요청에 발맞춰 이모저모 다듬고 또 어떤 부분은 다시 써서 보내 준 수정 원고를 살피면서 첫 만남 말고는 아무것도 나눈 시간이 없는 이 작가에게 시릿한 감동을 받았어요. 한 줄 한 줄 밑줄 그으며 문장과 낱말 하나하나 고쳐 쓴 그 살뜰한 정성 때문이었죠. 아울러 그 미세한 말투의 차이에서 북녘을 배려하는 작가의 세심한 마음씀도 오롯이 느낄 수 있었고요. 편집자로서 작가한테 크게 한 수 배우는 시간이었다고나 할까요. 재밌는 공부를 하는 기분도 느껴졌답니다. 


제가 북녘 사정에 좀 어두운지라 궁금한 게 있으면 한꺼번에 몰아서 작가에게 전화로 꼬치꼬치 물어 대기도 했어요. 북쪽 이야기는 어디 따로 알아볼 방법이 잘 없기도 했고요. 전자우편은 수십 통이 넘었고, 전화 한 번 나눌 때면 한 시간 넘게 통화하는 건 기본이었죠. 끊임없이 묻고 또 묻는 산골 편집자가 많이 힘들었을 텐데도 그때마다 정성 어린 대답과 철두철미한 뒷작업으로 일을 진행해 주어서 작가 복이 넘친다고 혼자 많이 좋아하곤 했답니다. 


빨간 펜 손에 쥐고 아무도 손대지 않은 새하얀 교정지를 맨 처음 마주할 때면 어찌나 설레고 두근거리는지 몰라요.


작가와 긴 소통 끝에 다듬은 글이 드디어 교정지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동안 컴퓨터 파일로 들여다보던 글자와 사진들이 종이 위에 처음으로 자리 잡은 모습. 아무도 손대지 않은 새하얀 교정지를 빨간 펜 손에 쥐고 맨 처음 마주할 때면 어찌나 설레고 두근거리는지 몰라요. 두툼한 종이 뭉치를 눈앞에 둔 이 흥분은 편집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 중의 특권이 아닐까 싶어요. 


“책은 사람이다!” 


누군가 남긴 이 글귀가 참 좋아요. 저도 책을 읽을 때 ‘사람 냄새’를 많이 느끼거든요. 그 냄새에 홀려 글쓴이의 흔적을 더듬더듬하는 시간을 참 행복하게 여기기도 하고요. 많은 독자들이 이 책을 보면서 작가의 따뜻한 마음을 느끼고, 또 글을 쓴 작가를 그리워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낱말 하나, 조사 하나를 바꿀 때도 연필로 썼다 지웠다 하면서 온 마음을 기울였답니다. 


분명 한글 파일로 수도 없이 살핀 글인데, 더구나 무더운 여름 몇 날 며칠을 집 안에 콩 박혀 빨간 펜으로 교정교열하느라 꽤 힘들기도 했건만, 1교지 작업을 다 마친 뒤에 마음 한끝이 뭉클해지면서 어떤 특별한 감동에 휩싸였답니다. 

스무 해 넘게 남북의 어린이들이 함께 만나는 그날을 그리며 오뚝이처럼 넘어졌다가는 또 일어서면서 꿋꿋하게 걸어온 길이 얼마나 아름답고 애틋하기만 하든지요. 이 소중한 이야기가 남녘과 북녘 땅에 널리 널리 퍼질 수 있도록 온 마음과, 없는 머리까지도 어떡하든 굴려서 열심히 해 보고 싶은 마음이 저절로 일어났어요. 작가가 오랜 시간 세상에 뿌린 정성과 사랑의 씨앗들이 책을 징검다리 삼아 더 멀리, 깊이 퍼지고 자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면서요.  


무더운 여름, 산골 혜원이네 집은 편집 일감과 뜨겁게 마주하느라 새벽부터 늦은밤까기 환하게 불이 밝혀졌어요. 


이 책을 편집하던 때는 역사적인 4.27 판문점 회담 뒤로 남북 사이에 평화 분위기가 그 어느 때보다 무르익던 시기였어요. 그러다 보니 텔레비전 없는 저희 집도 스마트폰 하나만으로 북녘을 다룬 뉴스를 참 많이 만날 수 있었죠.  


어느 날은 통일농구 뉴스가 나오더군요. 경기 장면이나 사람들 모습보다 주로 냉면 먹는 풍경이 많이 나오던데 음식 놓인 탁자 풍경을 저절로 눈여겨보게 되었죠. 이 책에 나온 아주 세밀하고 재미난 평양냉면 이야기가 생각나서요. 정말이지 그날은 북녘에 가 있는 그네들이 참 부럽기만 했어요. 물론 냉면 때문은 아니고요, 북녘의 어느 땅에 발 딛고 있다는 바로 그 사실 때문이었어요.


이 책을 편집하면서 글 속에서 만난,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북녘 사람들과 어느덧 정이 흠뻑 들었나 봐요. 그이들을 참으로 만나고만 싶었어요. 


피곤에 젖어 북녘 비행기에 오른 글쓴이에게 나지막한 노래로 위로를 건넨 승무원.
남녘의 한 사람이 평양을 떠나는 마음이 아쉬워 '아름다운 사람' 한 곡을 뽑자 그럴 때일수록 쓸쓸한 노래 말고 씩씩한 노래로 사업을 개척해야 한다고 타이르던 작은 술집 복무원.
인터넷이 안 된다고 항의하던 남녘 기자가 술에 취하자 자기 허벅지에 눕혀서는 토닥토닥하던 민족화해협의회 참사.
공장이 제대로 운영되지 못해 필기구 생산이 어려워지는 바람에 학생들을 위한 사명을 다하지 못한다는 걱정을 털어놓던 수지연필공장의 당 비서와 지배인.
백숙을 어찌 맨입으로 먹느냐며 강냉이 막걸리 한 사발을 건네던 조선민주여성동맹(여맹) 일꾼.
남녘 아이들과 그림편지를 주고받고, 돌발 사진도 함께 찍으며 반가움을 한껏 나누었던 북녘의 어린이들까지……. 


오로지 글로 만난 북녘 인연들을 두고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그리운 마음을 담아, 이 책에도 슬며시 나오는 노래 ‘가보고 싶어’를 혼자 불러 보기도 했답니다.


오로지 글로만 만난 사람들이 이렇게 그리울 수 있다는 게 참 신기하면서도, 어쩌면 당연하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같은 하늘 아래 숨 쉬고 있는 사람들이니까요. 그것도 아직까진 만날 수 없는 그곳에 있기에 그리움은 더 짙어질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지 않을까요. 


편집자인 제가 이러할진대 실제로 그이들을 마음 저 깊은 곳에 품고 있을 작가의 심정은 어떨지 생각하면서 늦은 밤 시릿한 마음을 홀로 부여잡기도 했어요.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그리운 마음을 담아 책 속에도 슬며시 나오는 노래 ‘가보고 싶어’를 혼자 불러보기도 했답니다.


‘산골 편집자’에서 ‘평화의 벗’이 되기까지

2018년 9월 중순, 산골 편집자의 뜨거운 여름을 오롯이 바친 책 <남과 북 아이들에겐 철조망이 없다>가 드디어 세상에 얼굴을 내밀었어요. 곧이어 책을 펴낸 파주출판단지 보리출판사에서 글을 쓴 이기범 작가의 출간 기념 강연이 열렸답니다.

 

뭔지 모르게 뛰는 가슴을 안고, 책을 만든 편집자에서 벗어나 오롯이 한 사람의 독자가 되어 작가를 만났습니다. 강연 끝에는 기쁘게 책 한 권 사들고 사인도 받았죠. 사인 맨 앞에 재밌는 글귀를 써 주는 바람에 저도 모르게 빵 터져 웃다가는, ‘평화의 벗’이라는 마무리 글을 보는 순간엔 가슴 시릿하게 행복하기도 했습니다. 


<남과 북 아이들에겐 철조망이 없다>가 출간된 뒤에 열린 작가 강연회에서, 책을 만든 편집자에서 벗어나 오롯이 한 사람의 행복한 독자가 되어 작가를 만났습니다.


강연이 끝나고 소박한 출판 기념 잔치를 하던 자리에서 우리들은 정말로 기쁜 소식과 마주했습니다. 바로, <남과 북 아이들에겐 철조망이 없다>를 쓴 작가가 9월 18일 평양정상회담 길에 함께하게 되었다는 벅찬 이야기였죠! 


‘이기범 교수의 마흔아홉 번 방북기’


이 책의 부제입니다. ‘이명박근혜’ 정권이라는 어둠의 시절, 북으로 가는 길이 끊기는 바람에, 작가는 2009년 마흔아홉 번째 방북을 끝으로 더는 북녘 땅에 발을 내딛지 못했지요. 아프고 배고픈 북녘 어린이들을 보듬지 못해 타들어 가는 심경이 책 말미에 생생하게 나옵니다. 그 글을 편집자로서 마주하는 시간 동안 제 마음도 참 아프기만 했어요.  

책을 편집하면서 작가한테 이런 질문도 더러 했습니다. 


“선생님은 언제 다시 북에 가실 수 있나요? 이젠 갈 수 있지 않나요?”


“아직은, 아직은….”


안타까운 목소리만 되돌아왔습니다. 그럴수록 제 소망은 더욱 간절해졌습니다. 이 작가가 빨리 북으로 갈 수 있기를, 그래서 스무 해 넘게 해 왔고 해야만 하는 일들을 부디 꼭 다시 할 수 있게 되기를…. 


그 바람 덕분은 아닐 테지만, 이기범 작가는 9월에 평양에서 열린 3차 남북정상회담에 대북협력민간단체협의회 회장으로서, 특별수행단 일원이 되어 드디어 50번째 방북 길에 올랐습니다. 9년 만에 비로소 평양 땅에 발 딛는 그 마음, 무어라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벅찼을 테지요.


1998년부터 마흔아홉 번에 걸친 이기범 작가의 방북 이야기를 따뜻한 글과 사진으로 책 곳곳에서 생생하게 만날 수 있답니다.


산골에 앉아 평양 남북정상회담 뉴스를 보고 있자니 <남과 북 아이들에겐 철조망이 없다> 곳곳에서 본 내용들이 많이 나오네요. 옥류아동병원, 만수대 창작사, 사회민주당, 그리고 또 옥류관 냉면은 물론이고요! 왠지 뿌듯해지면서 북녘이 참 친근하게 느껴지더군요. 


특별 수행단으로 함께한 방북이니 그간 북녘에서 맺은 인연들과 많은 만남과 이야기를 나누기는 어렵겠지만 낯익은 얼굴들, 공간들과 만나면서 작가가 많이 뿌듯해하지 않을까, 혼자 하는 상상만으로도 참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이 책의 인세 전부는 북녘 어린이들을 위하여 쓰입니다” 

맨 처음 이 책을 기획하는 자리에서 “이 책 인세는 모두 북녘 어린이들을 위해 쓰겠다”는 작가의 말을 들었습니다. 그땐 그저 흘려들었습니다. 설마, 했죠. 책이 어느 정도 진행되고 다시 만난 자리에서 작가는 그 이야기를 또 다시 꺼냈습니다. 그때 제가 이랬답니다.


“아니, 선생님. 이 책이 십만 부, 이십 만부 팔릴 수도 있는데 그런 말씀을 하셔요? 인세를 작가가 하나도 갖지 않는 건,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고요!
제발 다시 생각해 보세요!!”


상관없이 작가가 처음부터 일관되게 말한 그대로 “이 책의 인세 전부는 북녘 어린이들을 위하여 쓰입니다” 하고 책 판권에 인쇄가 되었습니다.

다음 날 그 자리에 함께 있던 출판사 선배가 말하길 제가 저 말을 십 분도 넘게 주절거렸다는데 참 어이없게도 기억이 잘 안 나요. 그날 산골을 떠나 치러야 했던 서울 출장 일정이 하도 빡빡하고, 또 종일 먹은 것도 없이 술부터 마셨더니만 그 순간 그만 잠시 끊어졌나 봐요. 


제 주절거림과는 상관없이 작가가 처음부터 일관되게 말한 그대로 “이 책의 인세 전부는 북녘 어린이들을 위하여 쓰입니다” 하고 책 판권에 인쇄가 되었습니다. 


이 글을 쓰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들 들였고, 고집쟁이 산골 편집자를 만나 어렵게 쓴 글을 덜고 다듬고 손보느라 또 얼마나 많은 밤을 지새웠는지를 잘 아는데…. 


그 무수한 노력과 정성 어린 시간들을 자기 몫으로 하나도 두지 않겠다는 그 마음에서, 당신에게 남은 모든 것을 북녘 어린이들을 위해 써 달라고 유언장에 남긴 권정생 선생님이 저절로 떠올랐습니다. 


이 책을 편집하면서 북녘 지도를 태어나 처음으로 펼쳐 보고,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북녘 사람들을 그리워하게 되고, 가 본 적 없는 북녘 땅 곳곳을 배낭 하나 달랑 메고 거닐고 싶은 마음이 절절하게 마음에서 우러났습니다. 북에, 북녘 사람들에 대해 저도 모르게 지녔던 편견, 선입견, 무관심까지도 이 책과 만나면서 스르르 허물어졌습니다. 마음의 경계가 녹아내리는, 애틋하고 뿌듯한 시간들이었지요. 


북녘 어린이 지원 단체 ‘어린이어깨동무’라는 작지만 큰 단체가, 그 단체를 한결같이 꾸려 온 이기범 작가가 스무 해 넘게 걸어온 시간들. 그 안에 담긴 가슴 시릿하게 아름다운 이야기와 제가 느낀 애틋한 감동을 더 많은 사람들과 나누고만 싶어요. 


부디 이 책이 널리 널리 읽혀서 작가의 아름다운 마음이 북녘 어린들에게 오롯이 다가갈 수 있기를, 그래서 남북이 평화롭게 만나는 세상을 앞당기는 길에 이 책이 노둣돌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산골 혜원 이야기 <이렇게 웃고 살아도 되나>보다, 편집자로서 마음으로 만든 책 <남과 북 아이들에겐 철조망이 없다>가 백만 배 천만 배 더 널리널리 읽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제가 작가로서 쓴 책 <이렇게 웃고 살아도 되나>와 나란히 놓인, 제가 편집자로서 마음으로 만든 책 <남과 북 아이들에겐 철조망이 없다>를 지긋이 바라봅니다. 둘 다 작은 산골에서 만들어진 책이죠. 


제가 쓴 책보다 이기범 작가의 책이 백만 배 천만 배 널리 널리 읽힐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산골 혜원 마음에 파도처럼 밀려오네요. 작가로서도, 편집자로서도 그리고 한반도의 평화를 바라는 이 땅의 한 사람으로서도 한결같은 바람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글을 쓰고 있습니다. 귀하고 아름다운 한 책과 작가의 이야기를 담아서. 


아, 한바탕 글을 쓰고 나니 이제야 저도 이 책에서 좀 빠져나올 수 있을 거 같아요. 왜 배우들이 그런 말을 하죠. 영화나 드라마 하나를 끝내고 나면 그 배역에서 벗어나느라 한동안 힘겨워한다고요. 편집자도 살짝 비슷한 점이 있어요. 글을 하염없이 매만지다 보면 어떤 때는 작가보다 더 그 속에 빠져들곤 하거든요. 그래서 책 한 권 만들고 나면 시원함과 섭섭함이 마음속에서 서로 제가 먼저라고 아우성을 친답니다. 


섭섭함보다 시원함이 조금은 더 크게 다가오는 지금 이 순간. 그 어느 때보다 뜨거운 여름, 산골 프리랜서 편집자로서 뜨겁게 작업하고 뜨겁게 사랑했던 <남과 북 아이들에겐 철조망이 없다>와 진짜로 헤어질 시간이 다가온 기분이 드네요. 이제부턴 한 사람의 독자로서 이 책과 만나야 하겠죠. 책이 세상에 얼굴을 내밀면 그 순간부터 아무도 모르게 사라져야 하는 게 편집자 앞에 놓인 아름다운 숙명이기도 하니까요. 


산골 프리랜서 편집자로 뜨겁게 작업하고 또 사랑했던 <남과 북 아이들에겐 철조망이 없다>의 정든 교정지랑도 이제 진짜로 헤어질 시간이 되었네요. 
이 책 제목을 정하는 길에 나침반처럼 저를 이끌어 주었던 그 노래, 김민기 선생님의 '철망 앞에서.'

편집자에서 독자로, 또 산골 혜원 이야기를 차곡차곡 그려 가는 한 사람의 작가로 탈바꿈하는 이 시간을 행복하게 받아들이며 마지막으로 노래 한 자락 새겨 봅니다. 이 책 제목을 정하는 길에 나침반처럼 저를 이끌어 주었던 그 노래, 김민기 선생님의 '철망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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