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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골짜기 혜원 Dec 17. 2018

“메주도 다 쑤고, 착해~” 산골 살림 마무리하는 날

메주처럼, 청국장처럼 구수하게 철들고 싶구나

메주 쑤는 날. 아침부터 불린 콩 큰 솥에 옮기고, 무쇠 화덕에 불 지피고, 헉헉. 날씨는 영하 십 도 안팎을 찍고 있건만 이거 저거 바삐 챙기자니 땀이 다 나네.  


메주 쑬 준비 마친 옆지기는 마을회관으로 간다. 마침 연말 마을회의랑 날짜가 겹쳐서는. 불 앞을 혼자 지키자니 아늑하고 좋기는 한데 조금 겁이 나는군. 콩물 끓어 넘치기 전에 옆지기가 와야 하는데, 그때부턴 나 혼자 감당을 못하는데…. 


구수하고 은근하게 달콤한 내음. 콩 익는 냄새가 살살 퍼진다. 솥 아래로 물도 방울방울 떨어지니 수건으로 솥뚜껑 닦기부터 시작. 그러면 덜 넘치니까. 


전날 저녁부터 물에 담가 둔 메주콩.  다음 날 아침에거의 두 배 가까이 부피가 늘어났다! 볼 때마다 신기방기.


홀로 불 앞을 지키다가 옆지기가 돌아오자마자 머리만 빗고 냅다 마을회관으로 달렸지. 불 지킬 사람은 한 명이면 되니까. 차려진 밥상에 얼른 수저 얹어 허겁지겁 밥을 먹곤, 먼저 몸 일으킨 귀촌 선배 언니 뒤를 쫓아 열심히(나름 즐겁게) 설거지하기. 


설거지 마치고 이제쯤 자리를 떠도 되겠지, 하던 순간 마을 엄니가 막걸리 한잔하라네. 마음은 가야 쓰겠지만, 마시자꾸나. 이런 날은 그래야 도리지. 근데 막걸리 말고 시원한 맥주가 먹고 싶네. 용감하게 한마디. 


“저, 맥주 있어요? 연기 잔뜩 마셔 그런지 속이 답답해서 맥주가 먹고 싶어요.” 


다른 엄니가 냉큼 일어나더니 맥주 한 병 가져오시고. 따라 주는 맥주를 마시며 잠시나마 두런두런.


“메주 쑨다며?”


“네, 저희가 다른 일이 많아서 좀 늦었어요.”


“착해, 메주도 다 쑤고.”


“어…. 농사도 잘 못 짓는데 김장이랑 메주라도 해야죠.”


메주콩 큰 솥 가득 채우고, 무쇠 화덕에 장작을 지핀다. 이제부터 여섯 시간 넘게 저 불 앞을 지켜야 한다.


메주 늦었다고 잔소리쯤 들을 줄 알았더니만 착하단 말을 다 듣고. 그저 민망하기만. 나와 있는 설거지 다 했고, 맥주 한 병도 싹 마셨으니 이젠 자리를 떠도 되겠지. 소주를 상자 채 놓고 먹는 아저씨들 자리에 가서 인사드리니 한 분이 싱글 웃으며 말을 건넨다.


“오늘 메주 쑨다며요? 그럼 그냥 오면 안 되지.” 


“네? 네?”


“콩을 가져와야지. 그 콩이 얼마나 맛있는데.”


그제야 감 잡은 산골새댁, “아, 그거요! 그게 아직 설익어서 못 가져왔죠. 집에 가실 때 들르세요. 그때쯤은 익었을 거예요.” 하여튼 우리 집 메주 하는 거 온 동네 다 소문나 버렸네. 


두 손을 둥그렇게 모아 입에 대며 콩 먹는 시늉을 하는 아저씨 모습이 재미나서 뒤돌아 나서는 마음이 괜스레 흐뭇흐뭇. 


‘마을회관 오길 잘했어!’ 


아침부터 추운 데서 몸 부리자니 은근히 힘들어서 오기 싫었는데, 역시 움직인 보람이 있구나.  


콩이 솥에 눌어붙지 않게 열심히 저어 보지만, 결국 적당히 타고야 말았음.
아직은 좀 더 익어야 한다. 콩이 나무국자에서 죽 흐르듯이 뚝뚝 떨어질 때까지. 
기나긴 메주콩 쑤기, 이제 거의 다 되었다!


집에 돌아오니 설거지 때문인지 낮술 덕분인지 팍 지친다. 나머지 콩 젓고 불 조절하는 일은 옆지기한테 넘기고 나는 살살 조금씩만 움직이기. 일주일 넘게 걸리는 김장에 견주면 메주는 뭐, 일도 아니라니깐. 


여섯 시간 좀 넘게 메주를 쑤고서 식히는 동안 산골 손님들을 맞이한다. 사는 고장은 달라도 우리처럼 어느 작은 산골에 사는 사람들. 메주 체험도 하고, 송년회도 할 겸 한 시간 조금 더 걸리는 먼 길 찾아오셨음.


얼추 식은 콩으로 청국장부터 만든다. 절구로 쾅쾅 찧어 곱게 빻은 다음 볏짚 꾹꾹 박으면 끝! 이제 고이 싸서 뜨신 자리에 두어야지. 그래야 잘 뜨니까. 절구질도 볏짚 만들기도 모두 아이들 몫. 정말 재밌어하고 무척 잘하기까지 해서 나는 사진 찍으며 신나게 구경만.


그다음 이어지는 메주 빚기. 콩 쑨 걸 커다란 비닐 여러 겹 안에 넣고 온몸으로 짓뭉갠다. 이건 양이 많아서 집에 있는 작은 절구로 빻기는 참말로 어렵기 때문에. 이것도 어른들이 끼어들 틈이 없네. 두 어린이가 비닐 사이로 느껴지는 물렁물렁한 느낌이 좋다면서 콩 담긴 비닐에서 떨어질 생각을 않는 바람에. 거기서 끝이 아니지. 삼촌이 하는 것 보면서 메주까지도 어찌나 야무지게 빚던지. 자연과 더불어 사는 너희들이라서 이렇게 손도 마음도 멋지게 착한 것이냐!


잘 익은 메주콩을 절구로 찧어 곱게 빻은 다음 볏짚 꾹꾹 박으면  청국장 만들기 끝! 요대로 감싸서 뜨뜻한 곳에서 띄우면 된다. 
삼촌이 하는 것 보면서 메주까지도 야무지게 빚는 자연의 아이들. 참 멋지고 착하다!
자연을 닮은 아이들과 함께 만든 메주와 청국장. 안방에서 가장 뜨뜻한 곳에 곱게 모신다.


다 된 메주와 청국장을 안방에서 가장 뜨신 자리에 모신다. 방 안을 휘감는 구수한 내음을 맡으며 슬금슬금 떠오르는 어느 농부님 생각.  


메주콩 있냐고 연락을 넣으니 콩을 골라야 한다기에 한참 걸릴 줄 알았지. 글쎄, 이틀 만에 20킬로 되는 콩 자루를 직접 들고 오신, 참 고집스러운 유기농 농부님. 정월에 맞춰 장 가르려면 좀 늦은 듯해서 바삐 손 놀렸다는 이야기엔 코끝이 찡. 기르고, 털고, 하나하나 골랐을 그 정성이 콩 한 알 한 알에 오롯이 스며 있을지니.


아쉽게도 메주 쑤는 일정이 그분 바람보다 좀 늦어졌지만 오로지 건강한 농사를 짓겠다는 마음 하나로 길러낸 콩이니, 분명 맛있는 메주가 될 거야. 거기다 자연을 닮은 아이들 손과 마음까지 보탰으니 더욱 그럴 테지!  


오로지 건강한 농사를 짓겠다는 마음 하나로 길러낸, 어느 고집스런 유기농 농부님의 정성 어린 귀한 콩.


한 해 산골 살림을 마무리하는 메주. 이렇게 고마운 농부님의 귀한 콩과 사랑스러운 아이들 손까지 더해서 너끈하게 마쳤다. 


자연과 함께 한 철 또 한 철 나고 있으니 나도 철이 좀 나야 하는데. 자꾸만 못된 심보가 마음에서 고개 드는 걸 차마 누르지 못할 때가 많다. 요즘 걱정이 좀 많아서 그런가, 전에는 괜찮던 일도 왜 그런지 마음에 안 들고 화가 치밀 때도 생기고. 그럴 때면 철이 들기는커녕 그나마 들었던 철도 가는 철 따라 가 버리는 듯해서 속상한 마음이 울컥. 


‘산골에 둥지 틀고 어느덧 여섯 번째 메주를 쑤었는데
그 시간에 들어맞게 메주처럼, 청국장처럼
나도 조금씩이나마 숙성하고는 있을까?’ 


안방 가득 늘어선, 어느 것 하나 똑같지 않게 울퉁불퉁 (내 눈엔) 잘생긴 메주를 바라보며 나에게 묻는다. 철없는 내가 스스로 답 찾을 길은 없고 그저 메주에 코를 킁킁대는데 요 냄새만큼은 언제 맡아도 좋구나, 좋아! 일 년 동안 참 그리웠지. 네모나게 향긋한 메주님들.  


그래, 올해는 안 들었다 쳐도 내년에는 어떡하든 쫌이라도 철들지 않겠어? 오늘만이라도 메주 쑤기 잘 마친 나한테 잘했다고 손뼉쯤 쳐 주자꾸나! 


작은 불씨만 있어도 금세 화라락 불꽃을 피우는, 마른 밤송이의 화려한 모습.  
꼭 크리스마스 트리를 닮은 듯한 밤송이 불잔치를 보는 재미, 메주 쑤기가 안겨준 특별한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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