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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골짜기 혜원 Dec 30. 2018

청국장을 열다, 내 마음을 보다

첫 마음 잃지 않고, 잊지 않고 살아왔는가...

청국장을 열었다. 메주콩 푹푹 쑤어 콕콕 찧은 다음, 볏짚 꾹꾹 박아 이불 꽁꽁 싸맨 지 보름 만에. 보통 청국장은 사나흘 띄우면 된단다. 시골서 만난 분들이 들려준 이야기부터 여기저기 보이는 정보들에 따르면 그렇다.


산골 살림 꾸리면서 모르는 게 있을 땐 웬만하면 다른 이들이 먼저 간 길을 따르고자 애쓰는데, 청국장만은 좀 달랐다. 청국장다운 구릿한 내음과 끈적이는 실끈이 보이기 전에는 여기저기서 알려주는 길잡이 글들을 어쩔 수 없이 외면했으니. 뭔가 많이 다르니까. 띄우는 환경도 콩도 또 다른 많은 것들도.


메주콩 푹푹 쑤어 콕콕 찧은 다음, 볏짚 꾹꾹 박아 이불 겹겹이 꽁꽁 싸맨 지 보름 만에 청국장을 열었다.


우리 집은 궁둥이가 뜨거워 데일 듯한 아궁이 방도 아니고, 도시에서 많이들 하듯이 전기밥솥에서 만드는 것도 아니니, 청국장만큼은 오로지 내 코와 눈을 믿을밖에 다른 길을 잘 찾기가 어려웠다. 


잘 띄어 보고자 방 안 가장 따뜻한 자리에 모신 청국장. 수건으로, 담요로, 이불로 겹겹이도 쌌지. 어쩌다 한 번씩 청국장 보자기를 풀어 헤치면 겉모습은 얼추 된 듯 보여도 나무젓가락 꾹 찔러 그 속을 들여다보면 내 마음엔 ‘아니올시다.’ 


그렇게 일주일, 열흘, 그리고 보름 가까이 흐른 뒤에야 굳세게 마음먹고 청국장 보자기를 열었다!


청국장 만든 지 일주일, 열흘, 그리고 보름 가까이 흐른 뒤에야 굳세게 마음먹고 청국장 보자기를 열었다.


구수하게 구릿한 내음은 풍부한데 청국장의 대명사, 끊일 듯 이어지는 실끈이 약하다. 군데군데 살짝살짝 하얀 곰팡이까지 보이는구나. 잠시(가 아니라 한참을) 고민.


산골살이 시작하고 어느덧 여섯 번째 만드는 청국장. 지난날들을 돌이키고 또 돌이켜보건만 아무리 생각을 더듬어 보아도 보름 넘게 띄운 적은 없다. 더 놔둔다고 해서 나아질 것 같지가 않아. 되려, 이러다 청국장 다 말아먹을 것 같은 두려움만 파도처럼.  


청국장 띄우기를 마무리하기로 마음먹고 볏짚을 하나하나 걷어낸다. 아, 뭔가 아쉽다, 아쉽다…. 


청국장 띄우기를 마무리하기로 마음먹고 볏짚을 하나하나 걷어낸다. 아, 뭔가 아쉽다, 아쉽다….


콩과 볏짚에 따스한 방 기운까지 더해져 만들어지는 청국장. 뭔가, 더 있어야만 했던 걸까? 어쩌면 그 청국장을 만들고 또 먹을 어떤 사람의 정성, 그리고 마음.


보통 때는 좀 시원하게(?) 지내던 걸 청국장 핑계 삼아 기름보일러, 나무보일러 번갈아 따뜻하게 때면서 할 도리를 다했다고 여겼는데. 아무래도 그게 다가 아닌 듯하다.


아, 실은 메주 띄우기에서도 벌써 탈이 났더랬다. 내 딴에는 얼추 메주가 말랐다고 여겨 볏짚 사이사이 메주를 담고 이불 꼭 싸매서 청국장 옆에 고이 모셔 띄웠건만. 뭐 한다고 바쁜 나머지 사나흘 넘게 들여다보지 않은 사이에 그만, 있어야 좋은 하얀 곰팡이와 함께 피지 말아야 할 알록달록 곰팡이 꽃들까지 여기저기 가득 피어난 모습을 만나야만 했나니.


급히 메주를 그물망에 담아 방 안에서 다시 말리기 시작했다. 이대로 밖에 내놓으면 얼어버릴 것 같으니까. 때마침 한낮에도 영하 5도를 넘나드는 한파가 몰아치기까지! 그러다가 햇살이 좀이라도 따스할 땐 마당에 내놓았다. 해님께 부디 나쁜 곰팡이(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으나)들을 조금이라도 거두어 주시라고 빌면서.  


6년 차를 맞는 산골 메주 인생에 쓰디쓴 아픔을 맞보는 시간을 겪고 있던 중, 믿었던 청국장마저 맘에 쏙 들지를 않으니 너무 슬퍼져 버렸다. 


피지 말아야 할 곰팡이 꽃들까지 여기저기 가득 피어난 메주들. 방 안과 마당을 오가며 말리고 있다. 


2013년 귀촌한 첫 해, 정말 정말 아무것도 모른 채 된장 청국장을 만들었다. 시골살이 경험이니까, 실패해서 다 버려도 좋다는 마음으로 만든 그것들이 실은, 지난 5년 동안 만든 된장과 청국장 가운데 가장 맛있었다.


그때는 메주에 이어진 이야기들을 정말 많이 찾아보았지. 산골 살이 초짜가 메주처럼 엄청난 일을 한다는 게 너무 겁이 나서, 떨리고 두렵기만 해서 참고할 수 있는 온갖 이야기들을 마구 섭렵하곤 했다.


그랬던 내가 조금씩 익숙해지면서 그냥 하던 대로, 조금은 무심하게(?) 메주를 쑤고 청국장을 띄워 왔다. 아마도 이번이 그 무심함의 최고조였을지도. 아니지, 그보다는 엉거주춤한 자신감이 더 문제가 아니었을까. 산골 살림에서 다른 건 몰라도 메주랑 된장, 간장은 직접 하노라고 게다가 맛도 적당히 있다면서 여기저기 자랑까지 하고 다닌 시간들이 사무치게 부끄럽기만 하다.   


‘초심, 첫 마음.’


자연과 더불어 살겠다고 서툰 발걸음 내디딘 나는 그 첫 마음 잃지 않고, 잊지 않고 살아왔는가. 청국장에 박힌 볏짚을 뽑아내면서 내내 마음 쓰릿하게 감도는 물음 앞에 똑바로 대답하기가 어려웠다.  


메주와 청국장 띄우기에 어설피 실패한 것(이라고 하면 메주와 청국장이 서운해할까나? 그래 아직은 모르니까). 초심을 돌아보라는 자연의 꾸중이자 주문 같다는 생각이 든다. 


천에서 덜어낸 청국장 덩어리에 소금 뿌려 팍팍 치댄 뒤에 통에 담는다. 이것으로 청국장 띄우기는 끝. 그럭저럭 기본 맛이라도 내기를 바랄 뿐, 사람이 더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천에서 덜어낸 청국장 덩어리에 소금 뿌려 팍팍 치댄 뒤에 통에 담는다. 이것으로 청국장 띄우기는 끝.


이제 남은 일은 메주! 적당히 따뜻한 집 안과 날은 춥지만 햇볕만은 따스한 마당을 오르락내리락하는 메주를 애틋하게 바라보며, 손으로 살짝살짝 보듬으면서 간절히 빌고 또 바란다. 


‘내 정성이 모자라 너희가 이리되었구나. 미안하다, 정말 미안하다. 이제 남은 시간은 메주 너희들의 힘, 그리고 하늘과 바람과 별과 해님께 맡겨야지. 부디 너희들이 구수한 된장과 감칠맛 나는 간장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기만을 이 겨울 내내 바라고 또 바라면서 하루하루를 보낼 거야. 이 내 마음이 들리거들랑, 좀 힘들더라도 꿋꿋이 산골 메주로 살아남아주렴, 부디, 꼬옥!” 


메주와 청국장 생각에 젖어 쓰릿한지 시릿한지 모르겠는 복잡한 마음을 다스릴 겸, 지난 봄 부끄럼 무릅쓰고 용감하게 펴낸 책 <이렇게 웃고 살아도 되나-산골 혜원 작은 행복 이야기>를 열어 본다. 


“시원하고도 담백하고, 칼칼하고도 구수하고, 시큼하고도 달콤하고. 된장찌개도 김치찌개도 흉내 내지 못하는 이 맛. 청국장찌개를 끓이고 먹으면서 청국장처럼, 묵은지처럼 내 자리에서 잘 묵은 사람이 되고 싶어진다. 내 안에 들어와 몸살도 마음살도 찌우는 청국장찌개가 행복하게 맛있다.” _214쪽 


청국장 잘 돼서 기쁘다고 혼자 행복해하는 이야기가 먼저 눈에 밟힌다. 그래, 저때는 청국장 보자기 열 때 활짝 웃었더랬지. 잘 뜬 모습에 참말 뿌듯해하면서. 따스한 햇살 아래, 내 눈엔 여전히 곱기만 한 곰팡이 메주님들과 나란히 놓인 책을 보고 있자니 어디선가 이런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네.   


“산골혜원 님, 우린 걱정 말아요.
다음 해에도 산골 밥상 든든히 지키는 맛있는 메주가 될 테니까요,
이제 그만 속상해하고 지금처럼 그렇게 계속 웃고 살아요!^^”


곰팡이 가득해도 내 눈엔 여전히 고운 메주야, 어리버리 산골 혜원 앞으로도 죽 웃고 살아도 되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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