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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골짜기 혜원 Dec 14. 2018

‘망사배추’ 네가 세상에 온 까닭

태안화력 ‘청년 비정규직 노동자’의 죽음 앞에서

구멍 가득한 망사배추(우리 텃밭에서 자란 배추에 제 맘대로 붙인 이름이에요)로 배춧국을 끓입니다. 열흘도 안 돼서 벌써 세 번째.


속이 덜 차도 너무 덜 차서, 비행접시처럼 넓게 퍼지기만 해서 그간 김장 때는 쓰지 못했어도 쌈배추, 배춧국으로는 한몫 단단히 했던 텃밭 망사배추. 


올해도 여지없이 구멍 숭숭 뚫린 아름다운 망사배추를 보며 산골 손님들 오거들랑 하나둘 뽑아서 국도 끓이고 쌈도 내줘야지 생각했어요. 그래서 나름 아끼면서 바라보기만 했지요.


그간 김장 때는 쓰지 못해도 쌈배추, 배춧국으로는 한몫 단단히 했던 텃밭 망사배추. 올해는 속이 안 차도 너무 안 차서 이 추위에 다들 얼어 죽을 것만 같아요.

그러던 어느 날, 마음을 바꿔야만 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활짝 꽃핀 듯 하늘바라기를 하는 이 배추들이, 아니 망사 꽃들이 이 시린 겨울을 견뎌내기 힘들겠더군요. 


이러다 하나도 먹지 못하고 그냥 땅으로 돌려보내야 할 것만 같아요. 물론 그것도 자연을 생각하면 그리 나쁜 일만은 아니지만 그래도 망사배추, 네가 세상에 온 까닭을 찾아주고 싶었어요. 찾고 싶었어요. 


구멍이 너무 숭숭하고 어느덧 조금 질겨서는 쌈배추로는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그래서 배춧국을 끓이기 시작했습니다.  


땅에 바짝 붙은, 한낮에도 언 몸이 녹지 않은 망사배추를 꾸역꾸역 칼로 잘라냅니다.
바라보고 있자니 왠지 서글픔이 일어나는, 푸른 빛보다 구멍이 더 많아 보이는 작은 배춧잎들을 씻고 또 씻습니다.


땅에 바짝 붙은, 한낮에도 언 몸이 녹지 않은 망사배추를 꾸역꾸역 칼로 잘라냅니다. 이 겨울에도 배추와 더불어 살고 있는 작은 벌레들이 엄청 많아요. 그러니까 망사배추를 탄생시킨 주인공들이죠. 검고 둥근 벌레들의 강인한 생명력에 얄밉기보다는 감탄이 먼저 일어납니다. 


바라보고 있자니 왠지 서글픔이 일어나는, 푸른빛보다 구멍이 더 많아 보이는 작은 배춧잎들을 씻고 또 씻으며, 한 잎 한 잎 어루만지면서 속말을 해 봅니다. 


‘배춧국이라도 열심히 끓여 먹으면
망사배추 네가 세상에 온 까닭을
조금은 헛되이 하지 않을 수 있는 걸까?’ 


된장과 뭉근하게 어우러진 망사배춧국은 맛있습니다. 구수합니다. 속을 편안하게 어루만져 줍니다.


겨울배추의 달큰한 맛은 덜하고 더러 풋내가 나는 듯도 하지만 된장과 뭉근하게 어우러진 망사배춧국은 맛있습니다. 구수합니다. 속을 편안하게 어루만져 줍니다. 벌써 여러 날 째 하루 두 끼 내내 먹는데도 질리지 않습니다.


오늘도 또 배춧국을 한 가득 끓입니다. 배추를 씻으면서, 썰면서 그리고 큰 냄비에 팔팔 끓이면서 여기저기서 들리는 소식. 태안화력 청년 비정규직 노동자의 차마 믿기지 않는, 믿을 수 없는 그 억울한 죽음을 생각합니다. 


컨베이어 벨트에 끼어 유명을 달리했다는데, 그것도 여섯 시간 넘게 방치되었다는데…. 


이 청년이 생사를 달리했습니다. 너무나 안타깝고 억울한 죽음 앞에 서럽기만 합니다.


“문재인 대통령, 비정규직 노동자와 만납시다.” 


“나 김용군은 화력발전소에서 석탄설비를 운전하는 비정규직 노동자입니다.” 


스물넷 청년이 피켓 들고 서 있는 사진을 애써 쳐다봅니다. 안경 너머 검은 눈동자가 꼭 이런 말을 건네는 것만 같습니다.


“부디 나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아 주세요….”


스물넷 젊은 청년이 세상에 온 까닭이 있을진대, 이렇게 빨리 돌아가려고 온 것은 분명 아닐 터인데. 그 까닭을 남아 있는 우리들이 찾아 주어야 할 것만 같은데….


열흘도 안 돼서 세 번째로 배춧국을 끓입니다. 그것도 큰 냄비 가득.


어지럽고 안타까운 마음 안고 그저, 망사배추가 세상에 온 까닭이라도 찾고자 국이나 끓이고 있습니다.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그것뿐인 것을요. 배춧국이라도 먹고 다시 힘을 내야만 하겠습니다. 


태안화력 청년 비정규직 노동자 김용군 님의 명복을 사무치게 빕니다. 펄펄 끓는 망사배춧국보다 더 뜨거운 서러움 가득 안고서….  


어느새  망사배추가 많이 줄었습니다. 
배춧국이라도 열심히 끓여 먹으면 망사배추가 세상에 온 까닭을 조금은 헛되이 하지 않을 수 있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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