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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골짜기 혜원 Jan 22. 2019

‘여자한테 좋다는’ 늙은호박 죽!

산골혜원 1년에 ‘딱 한 번’ 만드는 음식, 호박죽

지난해 텃밭에서 딱 두 개 건진, 신데렐라 동화 속 호박마차를 꼭 닮은, 보기만 해도 흐뭇한 늙은호박.  


나도 호박죽 참 좋아하는데, 나만 먹자고 귀한 호박 가르기에는 왠지 아깝고 아쉬워서 함께 먹을 누군가를 기다리며 미루고 또 미루었던 늙은호박 죽. 


더 놔두면 상할까 봐, 볼 때마다 괜스레 마음 졸이면서도 이제나 저제나 노란 호박죽 한 그릇 달게 먹으며 마음 달랠 사람이 찾아오기를 손꼽아 기다렸나니.


맛나게 먹어 줄 소중한 사람들 기다리며 다용도실에 고이 모셔둔 호박을 볼 때마다 과연 누가 호박죽의 주인공이 될지 무척 궁금했어. 그렇게 지난가을을 보내고 이 겨울까지 반 너머 지나갈 무렵, 드디어 이 호박을 꺼내는 순간이 오고야 말았다!   


맛나게 먹어 줄 소중한 사람들 기다리며 고이 모셔둔 호박을 볼 때마다, 과연 누가 호박죽의 주인공이 될지 무척 궁금했어.


호박죽에 얽힌, ‘여자라서’ 좋았던 기억

어릴 때 엄마는 그랬다. 늙은호박에 무려 ‘꿀’을 넣고 오래오래 곤 것을, 그 짜릿하게 달달하고 만난 주황빛으로 빛나는 음식을 딸내미들한테 먼저 먹으라고 했다. 여자한테 좋은 거라면서. 뒤따라 만들어진 달콤한 호박죽도 물론이었고.


이건 어린 나에게 참으로 엄청나고도 신기한 일이었다. 왜냐! 맛있는 건 무조건 ‘아들내미’들 먼저 챙기는 엄마였으니까. 사과 하나를 갈라도 씨 가까운 쪽 시큼한 것은 딸들, 씨에서 먼 달콤한 부위(?)는 아들들. 밥을 풀 때도 희고 고슬고슬한 쪽은 아들들, 맨 밑에 깔린 누룽지는 딸들. 그리고 또, 또…. 


하여튼 뭔가 맛있거나 조금이라도 좋은 것이 있으면 딸 ‘넷’은 저 뒤로 하고 아들 ‘둘’한테 먼저 먹이지 못해 애면글면하던 엄마가 글쎄, 이 맛있는 호박 음식만큼은 딸들을 먼저 먹이더라는 말씀! 


육 남매 가운데 셋째 딸로 살면서 여자라서 억울하고 싫었던 적, 그 어린 나이에도 사무치게 많았다.(지금 생각하면 참 유치하지만, 거의 ‘먹을거리’랑 이어진 슬픈 추억들.) ‘여자한테 좋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도 몰랐을 때지만 하여튼 호박 음식 앞에서만큼은 ‘여자라서’ 좋았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기만 하다.  


오빠, 남동생보다 먼저 먹을 수 있고, 마음껏 먹을 수 있어서 그렇게나 행복했다. 무엇보다 정말, 정말 맛있었고! 다행인지 아닌지, 오빠도 남동생도 호박 음식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둘 다 삐쩍 말라가지곤 원체 식탐과는 거리가 멀기도 했고. 그러니 엄마가 더 그렇게 애가 타서 이거 저거 먹이려고 그랬겠지. 


신데렐라 동화 속 호박마차를 꼭 닮은, 보기만 해도 흐뭇한 늙은호박.
때깔도 내음도 갓 딴 것마냥 싱그러운 호박 속살이여! 
씨와 얽히고설킨 호박 속(왼쪽) 끓인 물로 호박죽을 쑨다. 그러면 더 진한 맛이 날 테니까.


이런 기억들 때문인지 텃밭에서 나고 자란 늙은호박을 거둘 때면, ‘여자들(나 포함)’한테 맛 보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하게 들곤 했다. 그 생각대로 그동안 간신히 한두 개 열리는 늙은호박을 따 두었다가, 혼자든 여럿이든 산골에 찾아오는 ‘여자 손님’을 위해 산골 호박죽을 끓여 왔다.  


이번에도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늙은호박을 바라볼 때마다, ‘여자 중심’ 손님들이 찾아오기만을. 드디어 맞춤한 그날이 왔다. 여자만 오는 건 아니지만, 숫자도 서넛 뿐이지만 어쨌든 ‘남자’보다 ‘여자’가 더 많이 오는 날.  


때는 이때야! 뜨뜻 달콤한 호박죽은 겨울에 먹어야 제 맛. 추운 겨울 님 바삐 가버리시기 전에 호박죽을 쑤자꾸나! 호박을 가르고, 껍질을 벗기고, 얇게 썬다. 이때, 씨와 얽히고설킨 샛노란 호박 속을 팔팔 끓여서 그 물로 호박죽을 끓인다. 그래야 더 맛날 거 같아선. 


얇게 저민 호박이 폭삭폭삭 익어 가는 모습, 그리고 소리. 아 바라보기만 해도 흐뭇해.


얇게 저민 호박이 폭삭폭삭 익어 가는 모습, 그리고 소리. 아 바라보기만 해도 흐뭇해. 이젠 나무주걱으로 하나하나 뭉개야지. 그래야 때깔 고운 호박죽이 될 테니까. 양이 적으면 한소끔 끓인 뒤에 믹서로 갈 수도 있겠지만 들통 가득한 호박을 두고 그러기는 어렵지. 


호박죽 만드는 데만 서너 시간도 더 드네. 요것도 참 손이 많이 가기는 하구나. 하긴, 늙은호박 자라는 데는 반년도 더 걸렸잖아. 그 시간에 견주면 이쯤 노동은 아무것도 아닌 걸.   


호박죽 되기를 이제나저제나 기다리며 저녁도 미루고 기다리는 시간. 구수하고 들큼하게 호박이 익는 내음. 코를 지나 마음까지 뜨끈하게 적시니, 배가 고파도 참을 수 있다. 


나무주걱으로 하나하나 뭉개야지. 그래야 때깔 고운 호박죽이 될 테니까.


저녁은 호박죽 먹기로 작정한 나와 달리 호박죽은 ‘간식’ 정도로 여기는 옆지기는 꾸역꾸역 혼자 밥을 자신다. 호박 자르고 젓고, 실은 호박죽에 이어진 온갖 일을 보이지 않게 해낸 사람. 그 일 다 하느라 배가 고프기도 했을 테지. 


찹쌀 불려서 믹서에 드르르 간 것을 호박 끓이는 데 붓는다. 불은 약하게, 오래오래 저어 주기.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호박죽이 다 되었다. 


오메 맛난 거! 내가 이 맛을 얼마나 기다려 왔던가. 손님 핑계를 댔지만 실은, 내가 얼마나 얼마나 이 호박죽이 먹고만 싶었던지! 한 사발, 두 사발, 세 사발…. 끝도 없이 들어가는 호박죽. 이걸 먹으면 붓기가 내린다는데 이러다 없던 붓기도 생기겠다.  


호박죽엔 동치미가 짝꿍이지. 오메 맛난 거! 내가 이 맛을 얼마나 기다려 왔던고.
들통 그득한 호박죽. 산골 '여자 손님'들도 맛나게 먹으면 참 좋겠다.


여러 그릇 비웠어도 여전히 들통 그득한 호박죽. 곧 있으면 찾아올 산골손님들도 맛나게 먹으면 좋겠다. 입맛 가벼운 나한테는 맛나다지만 다른 이들한테도 그럴지 좀 자신이 없긴 해. 그래도, 혹여 입맛 없다고 손사래 치더라도 먹으라고 꾸역꾸역 퍼줄 테야. 


‘여자한테 좋은 거’라고,
‘산골혜원 일 년에 딱 한 번 만드는 거’라고,
박박 우기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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