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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골짜기 혜원 Feb 26. 2019

‘귀신보다 미세먼지가 더 무서워~’

‘손 없는 날’과 ‘말날’ 사이에 장 담그기

사람 일에 해를 입히는 귀신이 잠시 자리를 뜬다는 날, 바로 그 ‘손 없는 날’에 장을 담그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날에 맞춰 한 시간 가까이 소금을 물에 풀고 또 풀면서 장에 쓸 소금물도 애써 만들었건만. 


장 담글 때 쓸 소금물 만들기 불변의 법칙! 달걀을 띄웠을 때 오백 원짜리 크기만큼 위로 떠오를 때까지 소금을 풀고 또 풀기~
떠올라라, 떠올라라. 오백 원짜리 딱 그만큼만! 


장 담글 날로 점찍어 둔 그때 온 나라에 미세먼지가 기승을 부렸다. 메주 씻고 말리고 해야 하는데, 항아리부터 고추, 대추, 숯까지 죄다 해님 기운 듬뿍 받게 해야 하는데, 미세먼지 가득한 하늘 아래 도저히 내놓을 마음을 낼 수 없었다. 적어도 장 담그는 일에서만큼은 귀신보다 미세먼지가 더 무서웠으니까.


손 없는 날과 함께 장 담그기 좋은 날로 꼽히는 ‘말날’이라도 맞춰 보고 싶었다. (십이지신 가운데 말 그림이 그려진 날이 말날이란다. 중요한 교통수단으로써 말을 귀히 여기는 풍습에서 비롯된 날이라고도 하더라.) 2월의 말날은 바로 내일, 2월 26일이다.  


아침부터 일기예보를 살피니 내일도 미세먼지가 ‘나쁨’이다. 모레는 비까지 내린단다. 그나마 오늘 미세먼지가 ‘보통’이라고 뜨니, 바로 마음을 먹는다. 


‘산골짜기 혜원네 장 담그기 좋은 날은 2019년 2월 25일, 바로 오늘이다! 어쩌면 귀신 님도 미세먼지 싫어서 손 없는 날 말고 오늘에서야 어디든 마실 가셨을지도 몰라~’


저 높은 처마에서 추운 겨울 내내 해님, 바람님, 눈님 기운 두루 끌어안은 메주를 드디어 땅으로 내린다.
햇볕 아래 좌르륵 늘어선 메주들. 가까이 다가가 코를 들이대니 구수한 내음이 햇살 따라 퍼진다.


저 높은 처마에서 추운 겨울 내내 해님, 바람님, 눈님 기운 두루 끌어안은 메주를 드디어 땅으로 내린다. 메주 띄울 때 이모저모 어설픈 나머지 온갖 빛깔 곰팡이를 몸에 둘렀던 애달픈 메주들. 하나하나 고이 씻어서 해님께 맡겼다. 메주에 남아 있는 나쁜 기운들이 혹여 있거들랑 부디, 말끔히 가져가 주시옵소서, 바라고 또 바라면서. 


햇볕 아래 좌르륵 늘어선 메주들. 가까이 다가가 코를 들이대니 구수한 내음이 햇살 따라 퍼진다. 메주 띄우기를 잘 못해서 걱정이 많았는데 왠지 안심이 된다. 


‘냄새가 좋으면 된 거지. 어떡하든 장이 되기는 할 거야.’  

두어 시간 바짝 말린 메주를 항아리에 차곡차곡 쌓고 여러 날 고이 모셔둔 소금물을 붓는다. 


지난해 여름 텃밭에서 열심히 자란 고추. 시어머니께서 안겨준 작아도 알찬 대추. 참나무로 직접 만든 말갛게 검은 참숯. 메주와 함께 해님 기운 몸에 그득 담았을 테지?


지난해 여름 텃밭에서 열심히 자란 고추. 
시어머니께서 안겨준 작아도 알찬 대추. 
참나무로 직접 만든 말갛게 검은 참숯.


메주와 함께 해님 기운 몸에 그득 담았을 고추랑 대추랑 숯을 소금물에 고이 띄운다. 투명 ‘만능항아리’ 뚜껑까지 덮어 준 뒤에 두 손 모아 간절한 마음을 올린다.


‘제가 모자라서 메주를 잘 띄우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메주콩 정성껏 농사지은 농부님의 마음을,
천연소금 만드느라 애쓴 이들의 노고를 헤아려 주소서.

어설픈 산골농부 발자국 소리 따라 작은 텃밭에서 애써 자란 고추의 삶을,
누군가의 손길로 발갛게 영글었을 대추의 지난 시간들을 안아 주소서. 

마지막으로 어느 산자락에서 아프게 베어 넘어져
이 산골짜기 작은 집까지 실려 온 어린 참나무의 혼이 서린 참숯이
제 의미를 찾을 수 있게 도와주소서.’ 


이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장 가르기 하는 그날까지 하염없이 기다리는 몸짓뿐. 


밭에 뿌린 콩이 자랄 때까지 기다리고

솥에 삶는 콩이 익을 때까지 기다리고

빚은 메주 잘 띄워질 때까지 기다리고.  


그렇게 띄운 메주가 소금물과 만나 된장과 간장으로 다시 태어날 때까지 기다리고, 된장과 간장이 무르익을 때까지 다시 또 기다리고.  


장은 그렇게 ‘기다림’이다. ‘음식’이라는 테두리만으론 그 깊이와 넓이를 도저히 담아낼 수 없는 그런 존재.  


메주와 함께 해님 기운 몸에 그득 담았을 고추랑 대추랑 숯을 메주 옆에 고이 띄운다. 이제 남은 건 하염없이 기다리는 몸짓뿐.


‘손 없는 날’과 ‘말날’ 사이에 낀 2월 25일, 산골짜기 혜원네 여섯 번째 장 담그기를 한 오늘, 새로운 기다림과 마주한 이 순간이 뭉클하게 차오른다.  


날마다 바라보면서 기다릴 수 있다는 것. ‘장 담그기’가 안겨준 간장처럼 짠짠하고 된장처럼 구수한 행복함에 푹 빠져든다. 소금물에 폭 젖어든 저 메주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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