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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골짜기 혜원 Feb 24. 2019

함께한 시간 잊지 않을게, 다시 만날 그날까지!

마지막 동치미를, 동치미 항아리를 떠나보내는 마음

살짝 오랜만에 동치미 항아리를 열었다. 바닥이 훤히 보인다. 동치미가 바닥나고 있다는 사실, 벌써부터 알고는 있었다. 그랬기에, 쫌이라도 길게 동치미를 만나고픈 욕심에 얼마간 동치미를 밥상에 올리지 않았다.


요 며칠 미세먼지로 목이 칼칼하고 날은 또 뜨싯하게 차오르니 아무래도 동치미를 꺼내야지 싶었다. 더 두면 시어질 것만 같기도 했으니까.


살짝 오랜만에 동치미 항아리를 열었다. 바닥이 훤히 보인다.
알싸하게 담백하면서도 톡톡하게 입과 마음을 적셔주던 내 사랑 겨울 동치미, 마지막 동치미~


항아리를 기울여 얼마 없는 국물 몇 국자를 애써 떠올렸다. 작디작은 무 몇 개랑 같이. 동치미를 바라보는데, 항아리를 어루만지는데 뭔가 짠하다. 아, 드디어 마지막 동치미를 먹는구나, 이렇게 겨울도 가게 되는구나. 


동치미 국물 박박 긁어 싹 퍼 올렸건만 한 사발쯤 되려나 말려나. 남은 무는 항아리에 그대로 두었다. 냉장고보다는 덜 시어지겠다 싶어서. (국물 빠진 동치미 무를 어떻게 먹으면 잘 먹었다고 소문날까? 이건 찬찬히 생각하기로.)


마지막 동치미에 대한 ‘예의’를 지키고자 점심은 고구마랑 함께했다. 무와 더불어 텃밭에서 나고 자란 바로 그 고구마. 밥반찬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점심 밥상에 어엿한 주인공으로서 마지막 동치미를 몸과 마음에 담았다. 저녁이라고 다를쏘냐. 역시나 밥 대신 시어머니가 고이 싸서 보내주신 냉동 시루떡을 푹 쪄서 동치미와 나누었다. 


마지막 동치미에 대한 ‘예의’를 지키고자 점심은 고구마, 저녁은 시루떡으로 동치미와 함께했다. 밥반찬이 아니라 오롯이 밥상의 주인공으로!


이제 더는 손 호호 불며 뒤란으로 나가 얼음 통통 깨며 동치미 뜰 일이 없어졌다. 이 순간을 맞이하기가 왠지 조금 사무쳐서 마지막 동치미 뜨기를 미루고 미뤄 왔건만 그 시간은 끝내 오고야 말았다. 


마음까지 짜릿하게 적셔주던 산골 동치미. 더 많은 이들의 몸과 마음을 축이지 못한 게 조금 아쉽지만 지난겨울 내내 동치미 항아리가 있어서 든든했다, 행복했다. 동치미 뜨러 가는 발걸음은 제 아무리 추운 날도 언제나 사뿐했다. 


겨울에 먹는 김치, 동치미. 아, 이제는 정말 헤어져야 할 시간이 되었다. 여기저기 냉이 돋는 소식이 들리는 겨울 끝자락. 안녕은 영원한 헤어짐이 아니라고, 헤어짐은 또 다른 만남의 시작이라고 어느 노랫말에서 그려냈던가. 

봄이 오고 여름을 거쳐 가을 지나 겨울이 다가오면 다시 또 만날 수 있을 터이니 마지막 동치미를 기쁘게 떠나보내련다. 입을 거쳐 마음 저 깊은 곳으로. 


동치미야, 동치미 항아리야! 한동안 네가 많이 그리울 거야. 실은, 벌써부터, 시릿하게, 그.리.워….


알싸하게 톡 쏘는 겨울 김치 동치미를, 동치미 항아리를 그리는 마음만으로도 다가올 봄 여름 가을을, 무던하고도 삼삼하게 흘러갈 그 하루하루를 동치미처럼 알싸하게 담백하면서도 톡톡하게 보낼 수 있을 것만 같다. 


동치미야, 동치미 항아리야! 네 덕분에 추운 겨울도 넉넉하게 고맙기만 했어. 함께한 시간, 잊지 않을게. 다시 만날 그날까지! 한동안 네가 많이 그리울 거야. 실은, 벌써부터, 시릿하게, 그.리.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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