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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골짜기 혜원 Mar 16. 2019

시래기는, 기다림이다

바삭 마르고 푹 불어서 폭삭 익을 때까지

하늘 가까운 곳에서 바람 따라 하늘하늘, 바스락바스락 마르고 또 마른 이파리들. 기쁘게 먹어 줄 누군가를 소리 없이 기다려 온 무시래기를 조심조심 내렸다. 이번이 마지막이다. 더는 없다. 


지난겨울 산골에 찾아든 많은 사람들의 입과 마음을 구수하게 보듬어 준 무시래기. 한 소쿠리 가득 담긴 모습이 언제 보아도 아리땁다. 세상 어느 꽃다발이 이보다 예쁠쏘냐. 보고 또 보고 싶지만 어쩔 수 없이 물로 풍덩 빠뜨린다. 그래야만 먹을 수 있으니까. 


하늘 가까운 곳에서 바람 따라 하늘하늘, 바스락바스락 마르고 또 마른 마지막 무시래기를 내린다.
한 소쿠리 가득 담긴 모습이 언제 보아도 아리땁다. 세상 어느 꽃다발이 이보다 예쁠쏘냐.


무시래기는 이틀 넘게 물속에 잠겨 새 물로 갈아타고 또 갈아타면서 제 몸에 얽힌 흙과 묵은내가 떨구어지길 기다린다. 그래야만 제맛을 낼 수 있으니까. 


한껏 우려낸 무시래기를 압력솥에 삶는다. 솥이 뜨거워질수록 그윽한 내음이 집 안에 은은하게 퍼진다. 아, 참 좋다. 구수한 듯 담백하게 코에 스미면서 마음까지 푸근하게 적시는 이 향기를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직은 잘 모르겠다. 그저 무시래기 익는 내음이라고 쓰는 수밖에는.  


푹 익은 무시래기는 뜨거운 솥 안에서 다시 또 기다린다. 조금이라도 더 부드러워질 수 있도록, 제 몸을 감싼 열기가 완전히 사그라질 때까지 대여섯 시간을 그렇게….


하늘 아래서 기다리고 물속에서 다시 기다리고 솥에서 한 번 더 기다린 뒤에야 무시래기는  밥상에 오른다. 정말이지 오랜 기다림이다. 그 옆에서 나도 애틋하게 기다린다. 시래깃국과 시래기나물 맛나게 먹어 줄, 곧 있으면 날아들 산골 손님을.

 

무시래기는 이틀 넘게 물속에 잠겨 새 물로 갈아타고 또 갈아타면서 제 몸에 얽힌 흙과 묵은내가 떨구어지길 기다린다.


산골에 지내면서 싱그러운 산나물로, 오래 묵은 묵나물로 나물반찬을 만들어 왔다. 한데 무시래기처럼 긴 시간이 드는 건 참으로 드물다. 그저 무에 딸린 이파리일 뿐인데 어쩜 이렇게나 손 많이 가는 음식이 됐을까? 가끔 궁금해진다. 


귀촌하고 처음 살던 마을에서 이것저것 많이 알려주신, 참 멋지고 고마운 아주머니가 있었다. 어느 가을, 먹을거리 살림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그분한테 무청 엮어 말리는 걸 배웠다. 굴비 꿰듯 이리 꼬고 저리 엮으면서 아래로 죽 늘어뜨리는 기술인데, 한두 번 봐서는 따라 하기가 쉽지 않았다. 애써 흉내를 내다가 금세 포기했다. 그러고는 지금처럼 빨랫줄에 시래기를 널고 있다. 이쪽이 훨씬 쉬우니까.   


그때 아주머니는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무시래기 요리는 어려워. 며칠을 물에 불리고, 삶고 나서도 또 물에 우려서 묵은내를 빼고 또 빼야 돼. 안 그러면 군내 나고 맛없어. 아이고, 고거 힘든 일이야.”


시래기나물(왼쪽)과 시래깃국(오른쪽)은 오랜 기다림 끝에 그렇게 밥상에 오른다.


무시래기 반찬 할 때마다 늘 지침이 되었던 저 말씀. 무시래기랑 며칠 내내 같이 기다리는 날이면 그 목소리가, 얼굴이 아슴아슴 떠오른다. 다음에 만날 기회가 생기거들랑 요렇게 한 말씀드려 볼까나.


“저, 이제 시래기로 국도 나물도 그럭저럭 끓이고 만들 수 있어요. 바삭 마르고, 푹 불어서 폭삭 익을 때까지 기다리면 어떻게든 되더라고요.
시래기는 그렇게 기다림인 거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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