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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골짜기 혜원 Jan 23. 2020

“책상 하나, 작가의 글과 삶이 나를 지탱해 주었다.”

고독한 산골 편집자의 겨울비 내리는 밤

비 내리는 수요일이 저물고 있다.

창문 너머 빗소리가 귀를 적신다. 


종일 하던 일을 접고

시집 하나 열어 본다. 


“달빛이 스며드는 차거운 밤에는

이 세상 끝의 끝으로 온 것 같이

무섭기도 했지만

책상 하나 원고지, 펜 하나가

나를 지탱해 주었고

사마천을 생각하며 살았다

(…)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_박경리, ‘옛날의 그 집’ 가운데서


잠자고 밥 먹고

화장실 갈 때 빼곤

종일 책상에 앉아 

무언가를 하던 나에게 

촉촉한 위안이 되는 시.



쏟아지는 겨울비에

달빛마저 사라진 산골 밤이

이제 더는 무섭지는 않으나

쪼끔 외롭기는 하구나.  


아니, 외롭다는 말보단

사람이 그립다고 하는 게 

조금 더 맞을 듯.


가끔 그런 생각이 든다.

산골에 지내면서

마을 이웃 몇몇이랑

때마다 찾아오는 산골손님들 말곤

만나는 사람들이 거의 없으니

이러다 사회성이 자꾸 떨어져서

새로운 인간관계를 잘 풀어나가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내가 생각해도 참 어리석은 생각. 


나보다 한참 먼저 귀농한 

친한 동생이 있다.

더러더러 찾아갈 때마다

그렇게나 나를 꼬셨다.


“언니, 언니~ 

여기 와서 살아라.

품 팔 일도 많아서

먹고사는 건 어떻게든 될 거야.”


나는 무람없이 되물었다.


“먹고사는 거야 어찌 되겠지 뭐.

문제는 사람이야.  

시골에서 만날 사람도 없고

외로워서 어찌 살아~”


“언니, 언니! 여기두 좋은 사람들,

만날 수 있는 사람들 많아.

심심하지 않게 살 수 있어.”


십 년도 더 전에 나눈 이야기가

산골살이 하면서 자주 떠올랐다.

귀농이든 귀촌이든

요만치도 생각이 없던 때 주고받던

참 철없는 대화.


‘네 말이 맞기도 하고

안 맞을 때도 있고

사는 건 뭐, 그렇더구나~^^’


(나를 꼬시려고 애쓴 친한 동생은

여전히 시골에서 잘 지내고 있다. 

물론 중간중간 어려움을 겪긴 했다.

많은 시련을 겪었고, 많은 노력을 해냈다.) 



박경리 선생님이 남긴 

또 다른 글귀를 눈에 담는다.


“생각하는 시간을 많이 가져야 합니다.

자기 자신과 자주 마주 앉아보세요.

모든 창작은 생각에서 탄생하는 것입니다.

(…) 

고독하지 않고서 사물을 

정확하게 판단하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고독은 즉 사고니까요.

사고는 창조의 틀이며 본입니다.

작가는 은둔하는 것이 아니며 

작업하는 것입니다.

예술가는 도피하는 것이 아닌

작품으로 참여하는 것입니다”


통영에 있는 ‘박경리 기념관’에서

이 문장을 처음 만났을 때

왜 그런지 마음에 팍 꽂혀서

보고 또 보았더랬다.


표준국어대사전 가라사대,

‘고독하다’는 말은

‘세상에 홀로 떨어져 있는 듯이 

매우 외롭고 쓸쓸하다’는 뜻이란다.


텔레비전도 없고

일주일 너머 전화벨 한 번 

울리지 않는 때가 

쌔고 쌘 산골에서

가끔 느꼈더랬다, 고독을.

가끔 아팠더랬다, 고독이. 


외로움을 쓸쓸함을 고독을

자주 책상머리에서 달랬다.


오늘도 그랬다.

어느 작가의 창작물을,

사무치게 뼈 저린 삶이 낳은 

글을 보고 또 보았다. 


많은 사람들과 

이 귀한 작품을 나누기 위해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것.

그것만으로도 하루가 

쏜살같이 흘렀다. 



하루 종일 다른 이의 글 속에서

내 자신과 마주하는 시간을 보냈던 

고독한 산골 편집자는,

빗소리와 맥주 한 잔에 젖은 마음으로

박경리 선생님의 시와 글귀를

(군데군데 덜어내고서는)

내 맘대로 슬며시 바꾸어 보고만 싶다.


“겨울비가 스며드는 차거운 밤에는 외롭기도 했지만 

책상 하나, 작가의 글과 삶이

나를 지탱해 주었다.”


“모든 편집은 생각에서 탄생하는 것입니다.

사고는 편집의 틀이며 본입니다.

편집자는 은둔하는 것이 아니며

작업하는 것입니다.

도피하는 것이 아닌

책을 만들어내는 것으로

참여하는 것입니다.”


이래도 될는지 모르겠지만

이렇게 바꾸고 나니깐

뜻깊은 글 속에 파묻혀 지낸

오늘 하루가 그만저만 홀가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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