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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골짜기 혜원 Feb 20. 2018

마지막 동치미를 떠나보낸다

대동강 물도 풀린다는 따스한 ‘우수’ 날  이야기 


지난해 김장 때 담근 동치미가 드디어 바닥을 드러냈다. 마지막 남은 동치미 무를 꺼내 썰고, 남은 국물 싹 붓고, 소금과 물뿐인 동치미가 맛나게 익는 데 힘 보태준 사과, 갓, 쪽파, 고추를 건졌다. 


지난해 김장 때 담근 동치미가 드디어 바닥을 드러냈다.


짭짤한 국물에 시원한 지하수 내려붓고 한 모금 죽 들이킨다. 답답한 속이 뻥 뚫린다. 어느 이온 음료(ㄱㅌㄹㅇ) 광고가 생각난다. 한 잔 마시면 온몸으로 흡수되는 모습을 점점이 퍼지는 그래픽 화면으로 보여주던 거. 


요 동치미 국물이야말로 그 광고에 딱 어울린다. 정말이지 물보다 더 시원하고 짜릿하게  온몸으로 쑥쑥 스민다. 연탄가스 중독됐을 때 동치미 국물부터 마신다는 이야기, 그럴 만하다고 동치미 먹을 때마다 생각하곤 했지. 소금물에 무를 담갔을 뿐인데 어찌 이리 시원담백한 맛을 낼 수 있는지. 더부룩한 속도 답답한 마음도 삽시간에 풀어줄 수 있는지. 먹을 때마다 신기하고 고맙고 황홀하기만 했다. 


소금물뿐인 동치미 맛에 힘을 보태준 사과, 고추, 쪽파, 그리고 오 마이 갓님!  제 몫을 다하고 땅으로 돌아갔노라~~         


아삭아삭한 무 맛은 또 어떻고. 마치 아무 맛도 없는 듯하지만 꼭꼭 씹으면 고소하기 이를 데 없다. 기름 둘러 볶은 것도 아닌데, 그저 소금물에서 건진 무일 뿐인데 이토록 은근하게 고소하다니! 이 또한 먹을 때마다 나를 감탄에 빠져들게 했나니.  


올겨울 그리도 내 마음과 몸을 시원하게 쓰다듬어 주던 동치미가 드디어 끝이 났다. 믿기지 않지만, 믿고 싶지 않지만 엄연한 현실. 동치미 없이 이제 어찌 먹고 살아야 하나, 아쉬움이 파도처럼 밀려든다.

밥상에서 벌건 김치보다 더 손이 가던, 밥 먹고 난 뒤에 물 대신 들이키던, 속 아프고 더부룩할 때도 마냥 마셔댔던, 내겐 너무 귀하고 소중했던 동.치.미.님.


아쉬움 달래고자 남아 있는 무 두 개랑 여전히 멋지게 하늘거리며 줄에 매달린 시래기를 본다. 지난해 텃밭에서 자기들 힘으로 열심히 자란 요 이쁘고 귀한 무, 그리고 무청.  동치미는 끝났어도 아직은 무가, 시래기가 남아 있다. 가을무 기운 잔뜩 서린 먹을거리들 바라보며 아쉬움을 애써 밀어낸다. 무도, 시래기도 좋아하는 마지막 겨울 손님이 찾아오시걸랑, 무나물로 시래기볶음으로 그리고 시래깃국으로 모조리 내드리리! 


지난해 거둔 가을 무 두 개, 국이랑 볶음 한 번 하면 딱 좋을 만큼 남은 시래기가 남아 있으니 동치미 없어도 괜찮아.


어제는 ‘우수’였다. 이십사절기 가운데 두 번째 절기. 눈이 녹아서 비가 된다는 날. 한반도에서 가장 위쪽에 있다는 대동강 물도 풀릴 만큼 날씨가 풀린다는 바로 그날. 우수라서 그랬나 봐. 아랫집 할매가 참말 오랜만에 우리 집 위에 있는 밭으로 발걸음하신 건. ‘따다다다’ 경운기 소리가 여기저기서 울려 퍼진 건. 덩달아 나도 봄맞이 밭 맬 궁리를 겨울 들어 처음으로 하게 된 건. 


그래, 동치미는 겨울에 어울리는 먹을거리지. 우수까지 먹었으면, 참 잘 먹은 거야. 슬슬 봄을 알리는 먹을거리들 찾아나서야 할 때가 됐다는 걸, 내겐 너무 소중한 마지막 동치미가  먼저 알려준 셈이 됐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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