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상락재 Sep 08. 2022

시인할머니 황보출

언젠가 신문에서 이런 기사를 보았습니다. 늦깍이로 한글을 배운 어느 할머니가 여든넷의 나이에 시인으로 데뷔하셨다는 소식이었지요. "어려서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의 행복이 있습니다"라는 말씀에 마음이 시큰해진 나는 그 때부터 황보출 시인할머니의 팬을 자청하며 시집을 구입하고 인터뷰를 찾아읽기 시작했습니다.


A5 사이즈의 수첩보다도 얇은 할머니의 시집 안에는 간결하고 거짓없는 지혜의 말이 가득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울림이 컸던 구절은 이제야 나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고백이었지요.


내가 나를 무시하고 산 게 잘못했다.
늙어보니 지금 알겠다.
내 인생에 이 시간,
나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고,
내가 나를 사랑하고 있네

지혜는 나이가 든다고 자연히 생기는 시간의 선물이 아닌데, 무엇이 할머니를 이토록 지혜롭게 만들었을까요?


평생을 까막눈으로 사셨던 할머니는 일흔의 나이에도 글을 배우기 위해 인천에서 서울 이문동까지 왕복 4시간의 거리를 십수 년간 오가셨다지요. 할머니를 모시고 사는 막내 따님이 포항으로 이사간 지금도,    절반은 경기도 광주에 있는 둘째 따님댁에서 지내며 이문동까지 수업을 들으러 다니신다구요.  근처 편의점도 걸어가기 귀찮아서 차를 몰고 간다는 요즘 세상에,  간의 수고로움도 대단찮게 여기시는 89 할머니의 단단함이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습니다.


약숫물 마시며 "물아, 고맙다" 말하고, 단비에 고개를 든 농작물에게 "수고했다, 사랑한다" 인사하는 할머니의 마음은 또 얼마나 소녀처럼 보드라운지요. 그 마음이 시인할머니의 수줍고 맑은 얼굴에 다 묻어납니다.

하지만 할머니가 처음 글을 배우고 쓰기 시작했을 때에는 온통 세상을 비관하는 내용 뿐이었다고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할머니의 삶은 너무나 모질었습니다. 대대로 남의 집 몸종살이를 하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식모살이를 하셨다지요. 그러니 학교는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습니다. 밥이라도 굶지 않으려고 열아홉 나이에 재취 자리에 시집을 갔고, 그 후 허리 한 번 펼 새 없이 농사를 지으며 8남매를 길러내셨습니다. 자식들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매일 새벽부터 밤 11시까지 밭일을 하던 어느 날, 남편이 골수암으로 훌쩍 세상을 떠나버렸습니다. 외아들의 죽음을 예감한 시어머니가 농약을 마시고 생을 마감한 지 3일 후였지요. 그 때 할머니의 처참한 심정을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요.


다 자기 탓 같아서 3년간 고개를 들지 못했다는 할머니는 과로로 자신을 몰아세우다 결국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막내 따님이 서울로 모셨지만, 우울증 탓에 골목골목을 누비며 눈물을 떨구셨다지요. 그 모습이 안쓰러웠던 막내 따님은 한글 학교를 권했습니다. 못 배운 것이 평생 한이었던 할머니에게 글을 배우는 건 설레는 일이었지만, 마음 속에는 여전히 납덩이보다 무겁고 섣달 그믐보다 시린 세월이 들어앉아 있었습니다. 시인 선생님이 그 기억을 글로 풀어내 보시라고 아무리 권해도, 할머니는 눈시울만 붉힐 뿐 절대로 기억하려 하지 않으셨답니다. 깊숙이 묻어둔 것만으로도 가슴 저미는 기억을 어떻게 꺼낼 수 있을까요. 그 고통을 어찌 감당할까요.


선생님과 할머니의 줄다리기는 몇 달간 이어졌습니다. 상처를 마주하는 불편한을 알면서도 선생님이 설득을 멈추지 않았던 것은 나를 돌아보는 일이 치유의 시작임을 아셨기 때문이겠지요. 그리고 할머니는 자신을 숙고하는 일을, 그 어려운 일을 기어이 해내셨습니다. 그렇게 모진 세월과 일그러진 마음이 슬프고 아름다운 시가 된 것이지요. 서로 더 먹으라며 엄마와 주먹밥을 양보하던 배고픈 어린 시절, 주린 배를 욺켜쥐고 하루종일 시장 귀퉁이에서 행상 하던 날들, 재취 자리에 시집와 40년간 전처의 제사를 모시던 이야기, 얼어터진 손을 오줌에 담가가며 동지 섣달 얼음물에 빨래하던 기억까지. 그러면서 할머니는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삶의 구비구비마다
그저 참아야 하는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글을 배우고 나니,
그것을 털어놔야 내가 편안해지겠구나 싶었다.
일기인지 시인지 모를 글을 계속 썼다.
그러다 보니 마음의 돌이 사라진 느낌이었다.
머리가 맑아진 느낌이었다.
그제야 진정 행복할 수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인생이 달라졌다.

자식들만큼은 눈 밝게 키우고 싶으셨던 할머니는 가난한 형편에도 8남매 중 여섯을 대학에 보내셨고, 그것이 가장 큰 자랑이었습니다. 서강대를 졸업한 장남이 대덕연구소에 들어갔을 때는 온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다지요. 그러나 고생하며 키운 자식들이 하나둘 인연을 끊었을 때, 할머니의 마음이 얼마나 괴로웠을까요. 내가 다 원망스러웠습니다. 그러나 오랜 시간 글을 쓰면서 자신을 내려놓은 할머니는 이제 서운함 대신 미안한 마음 뿐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신 욕심에 아직 어린 자식들을 공부시키려 서울로 보낸 탓이라고 말이지요. 씨앗 뿌려 돋아난 새싹도 이리 어여쁜데, 내 새끼들이 어미의 사랑을 필요로 할 때 품에 끼고 사랑을 듬뿍 주었더라면 이리 되지는 않았을 거라고 말입니다.


남을 바꾸지는 못합니다.
내가 내 얼굴을 밝게 바꾸면
그것이 이 세상
다 바꾸는 것입니다

내 마음 하나 바꾸면 온 세상이 환해진다는 할머니에게서 우주에 대한 깊은 이해를 봅니다. 깨달음을 얻는 일이 꼭 종교인과 영성가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겠지요. 이 삶을 살고 있는 우리 모두가 길을 찾아가는 구도자이기에, 그 길에서 자신만의 지혜를 일군 이들은 모두 깨달음에 가까이 가고 있는 것이라 믿습니다.

이제는 힘들었던 기억도 다 흘려보내고 그저 밝은 생각으로 산다는 할머니는 여든아홉 나이에도 행복할 수 있어 감사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언젠가 월리와 나도 할머니처럼 응어리 없이 고운 마음으로 말갛게 웃을 수 있을까요? 그 때는 우리도 '오래 아팠기 때문에 지금의 행복이 있다'고 망설임 없이 말할 수 있을까요? 그저 두 손을 모아봅니다.




《덧글》 시집 뒷편에 실린 막내 따님의 글을 옮겨봅니다.

어머니와 많이 싸웁니다. 싸움에서 제가 이기지만, 이상하게 제가 진 것 같은 기분이 할상 듭니다. 한 번 몰입하면 끝까지 하시는 어머니는 지금도 글쓰기와 밭농사에 열심입니다. 저는 그런 어머니를 멈추게 하려고 열심히 싸우고 삽니다.

자기 자신은 조금도 위하지 않고 엉덩이 한 번 붙일 틈 없이 일하는 엄마를, 나는 참 많이도 말렸습니다. 유방암으로 종양제거술을 받은 직후에도 기어이 아들의 손빨래를 하고야 말던 엄마였고, 그런 엄마를 말리느라 지독히도 싸워댔지요. 할머니의 막내 따님  마음을 천 번, 아니 만 번이라도 이해할 것 같아서 이 글을 읽고 참 많이도 울었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애틋한 마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