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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의 꼬리곰탕

새벽야근의 추억 남대문 시장 '진주집'

by sangre Mar 12. 2025



 나의 첫 회사는 남대문 근처에 있는 광고대행사였다. 이 말은 곧 야근이 일상이었다는 말과 같은 뜻이고, 이를 달래기 위해 남대문 근처의 맛집들을 줄기차게 찾았다는 말과 같은 뜻이다. 남대문 근처에는 광고회사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오래되고 독특한 맛집들이 골목마다 숨어있었고, 그 집들마다 회사를 같이 다니던 선후배들과 얽힌 에피소드들이 한가득이다. 그중에서 내가 제일 좋아했던 음식이자, 독특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음식은 바로 <진주집>의 대표 메뉴인 꼬리곰탕이다.


 <진주집>은 당시에도 이미 꼬리곰탕으로 엄청 유명한 남대문 노포였고, 가격도 만만치 않은 유명 맛집이었다. 처음 이 집에서 꼬리곰탕보다 더 비싸고, 더 튼실한 부위를 내어주는 '꼬리토막'이라는 메뉴를 맛보았을 때, 너무 맛있었던 기억과 동시에 너무 비싼 가격에 놀랐던 기억이 있다. 입에 쩍쩍 달라붙는 진한 국물과 두툼한 소꼬리도 참 맛있었지만, 이 집을 자주 찾았던 가장 큰 이유는 당시에 24시간 영업을 하는 얼마 안 되는 집이었기 때문이다. 남대문 시장 인근의 식당이나 술집들이 은근히 일찍 문을 닫는 곳이 많아서 술자리가 3차, 4차까지 늦게 이어지면 의외로 갈 곳이 마땅치 않았다. 그럴 때 자연스럽게 이 집을 추천하는 건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는 내 '맛집 필승 카드' 중 하나였다. 그렇게 이 집에서의 기억은 주로 새벽 시간이었고, 진한 꼬리곰탕 국물과 함께 소주잔을 기울이던 선배들, 회사 동기들, 고등학교 친구들에 대한 것들이었다. 그리고 나에겐 여기에 더해 새벽 시간에 이 집을 찾아야 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당시 회사 내 조직개편에 따라 나는 새로 만들어진 신생 기획팀의 일원이 되었다. 광고대행사 기획팀의 주요 업무는 제작팀과 매체팀의 도움을 받아 경쟁 PT에 참여해서 신규 광고 캠페인을 수주하고, 수주한 캠페인이 잘 운영되도록 하는 일이 메인이다. 광고 캠페인은 주로 연단위로 진행되기 때문에 시기별로 각각 다른 광고 캠페인 경쟁 PT에 참여하는 게 매년 반복되는 우리의 일이었다. 우리 팀은 새로 만들어진 팀이었기 때문에 신규 캠페인을 수주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따라서 경쟁 PT에 참여하는 의지가 남다를 수밖에 없었는데, 좀 더 좋은 제안을 하기 위해서 PT날짜가 다가올수록 점점 퇴근 시간은 늦어져만 갔다. 그러던 어느 날, 일하느라 저녁 시간도 놓쳐버린 우리 팀은 밤늦게서야 저녁 식사를 하러 회사 밖을 나섰는데, 대부분 가게들이 문을 닫아서 딱히 갈만한 곳도 없었다. 배가 많이 고프기도 하고, 밤늦게까지 일하는 게 서럽기도 해서 뭔가 맛있는 걸 먹어야만 기분이 풀릴 것 같았다. 마침 내가 남대문 시장에 있는 꼬리곰탕집 이야기를 꺼내자, 팀장님과 차장님 모두 가본 적이 없다 하셨다. 그래서 내가 앞장서서, 우리는 남대문 시장 안 쪽의 <진주집>을 찾아 나섰다. 남대문 시장을 낮에 찾아가면 은근히 복잡해서 길을 찾기가 쉽지 않은데, 한 밤 중에 시장 안 쪽의 <진주집>을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과연 문을 연 집이 있을까~?' 싶을 만큼 컴컴한 시장 안 쪽으로 주욱 들어가면, 유일하게 불이 켜져 있는 <진주집> 간판이 나왔다. 반가운 마음에 한달음에 식당에 들어선 우리는 나의 추천에 따라 든든한 꼬리곰탕을 하나씩 시켰고, 늦었지만 매우 호사스러운 저녁 식사를 할 수 있었다. 비싼 가격만큼이나 다들 무척이나 만족스러운 식사였다. 그렇게 계속된 야근과 PT 준비로 지친 몸과 마음을 꼬리곰탕으로 든든하게 채운 우리는 든든한 체력을 발판 삼아 열심히 PT준비를 했고, 그 결과 당당하게 경쟁 PT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팀이 만들어지고 제대로 준비한 첫 PT를 따왔으니, 당연히 우리 팀의 사기는 드높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운 경쟁 PT에 또 참여할 일이 생겼다. '여세를 몰아 이번 PT도 따오리라!' 참 열심히 준비했고, 또다시 야근의 날들이 이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한창 야근 중에 저녁으로 뭘 먹을까 고민하다가 다시 <진주집> 이야기가 나왔다. "지난번에 꼬리곰탕을 먹고 PT를 따왔으니, 이번에도 PT 전에 한 번 가야 되는 거 아닌가?" 참으로 현명한 판단이며, 좋은 핑계가 아닐 수 없었다. "가자 가자~ 암 그래야지" 그렇게 또 한 번, 늦은 저녁 시간에 셔터가 내려진 컴컴한 시장 안 쪽으로 우리는  <진주집>을 찾아 출동했고, 여전히 맛있었던 꼬리곰탕을 배불리 먹고 돌아왔다. 며칠 뒤, 우리는 경쟁 PT에서 또다시 승리를 쟁취할 수 있었다.


 이제는 의심할 나위 없이 분명해졌다. 꼬리곰탕은 우리 팀 승리의 부적이며, 토템이자, 행복한 징크스임이 분명했다. 이제는 경쟁 PT를 준비할 때면 없는 시간을 내서라도 그 집을 다녀와야만 했다. 행여 PT 준비가 너무 바빠서 <진주집> 가는 걸 잊어버리고, 그 PT에서 떨어지기라도 한다면, 나는 그 아쉬움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그렇게 시작된 <진주집>과 우리 팀의 행복한 동행은 한 동안 계속되었다. 그 뒤로도 우리 팀은 경쟁 PT에서 연전연승을 이어갔고, 그때마다 새벽에 꼬리곰탕을 먹으러 가는 걸 잊어버리지 않았다. 몇 년 간을 그렇게 참 열심히 재미있게 일을 했었다. 계속해서 신규 캠페인을 수주한 덕에 일도 엄청 많아졌고, 까다로운 광고주들의 요청들을 맞춰 주느라 몸도 마음도 너무 고생이 많았지만, 그만큼 성과도 보람도 큰 시절이었다.


 그렇게 가열차게 몇 년을 보냈던 우리 팀원들은 지금은 모두 흩어져 각자의 분야에서 또 다른 삶을 열심히 살아가고 있지만, 어쩌다 오랜만에 얼굴을 볼 때면 빼놓지 않고 야근하며 꼬리곰탕 먹으러 다니던 시절 이야기를 하곤 한다. 지금은 남대문 근처에 적을 두고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지만, 그래서 <진주집>을 다녀온 지도 오래되었지만, 그리고 그 사이에 가격은 더더 많이 올랐지만.. 언젠가 한 번은 같이 모여서 <진주집> 꼬리곰탕을 먹으러 가는 날이 또 있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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