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하라 199X, 고등학생의 첫 커피숍 방문기
이런 이야기를 하면 어쩔 수 없이 나이가 드러나게 마련이지만, 내가 수능을 준비하던 시절에는 '모범생'들이 출입하면 안 되는 곳들이 있었다. 당구장, 술집, 만화방, 노래방, 오락실 그리고 커피숍 같은 곳들이었다. 가지 말라고 하면 가고 싶어 지는 게 인지상정이라, 얼마 안 되는 자유시간을 빌어 친구들과 몰래몰래 몇 군데 돌아다녀봤지만, 딱히 재미를 붙이진 못했고, 특히 커피숍은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다. 사실 당시 남자 고등학생이 커피숍을 가는 이유가 다분히 연애경험과 연결되는지라, 여자친구 없는 이들은 경험하기 힘든 일 중에 하나였다. 분위기 좋은 커피숍에 자리를 잡고, 커피숍 전화기로 삐삐를 치고, 전화가 오길 기다리거나, 애인을 기다리는.. 나중에 <응답하라> 시리즈나 <스물다섯 스물하나>와 같은 드라마에서 재현되던 그런 경험이다. 아무튼 나로서는 여자친구도 없었고, 삐삐도 없었고, 학교 야자는 밤 11시까지 있었으니, 그렇게 밖에서 시간을 보낼 여유도 없었다. 그런 내가 처음으로 '커피숍'을 가보게 된 건, 고3이 되던 겨울, 중학교 때 친구가 오랜만에 만나자고 연락을 해와서이다.
"진짜 오랜만이다! 어디서 볼까? 교보문고?"
"아니야 서점은 좀 그렇고.. 너 <나이아가라>라고 알아?"
"아니, 그게 어디 있는 건데?"
"XX동에 새로 생긴 커피숍인데 괜찮더라고, 거기서 보자"
"아.. 그래, 한 번 찾아가 볼게!"
그렇게 태어나서 처음으로 가보게 된 '커피숍'. 솔직히 뭘 입고 가야 하고, 가서 뭘 시켜야 하는 건지 감도 안 잡혔다. 어찌어찌 찾아간 새로 생긴 커피숍 <나이아가라>는 이름에 걸맞게 매장 안에 거대한 수로가 놓여 있었고, 비단잉어들이 돌아다니고, 수풀이 우거져 있고, 클래식 음악이 흐르는, 너무나 어른스러운 공간이었다. 친구는 먼저 와서 자리를 잡고 있었는데, 누가 봐도 까까머리 고등학생이었던 나와 달리 친구는 얼핏 대학생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사복'도 잘 어울리고 제법 어른스러웠다. 몇 년 만에 보는 거라 무척 반갑게 인사를 하고, 뭐라도 시키자며 메뉴판을 들었는데, 거기에는 알 수 없는 메뉴들로 가득했다. 뭔가 이상한 걸 시키면 너무 처음 와 본 티가 날 거 같고, 그렇다고 뭔지도 모를 커피들을 시킬 수도 없고, 커피숍에 왔으니 커피를 시켜야 할 거 같은데 종류가 너무 많고, 하릴없이 메뉴판을 뒤적거리고 있으니 친구가 메뉴를 추천해 줬다.
"너 아이리쉬 커피 안 마셔봤지?"
"어 한 번도 안 마셔봤어"
"난 커피는 이이리쉬만 마셔, 이게 술이 살짝 들어간 커피라 독특하고 마실만 해. 그리고 이렇게 컵 입구에 설탕이 살짝 둘러져 있어야 진짜라고"
와.. 커피를 언제 저렇게 잘 알게 되었지? 나는 반쯤 넋 나간 표정으로 청산유수 같은 친구의 커피 설명을 듣고 있었다. 술이 들어간 커피라니, 고등학생이 마셔도 되는 건가? 근데 저 정도의 전문적인 의견이면 한 번 도전해 볼 만하지 않나? 맛이 엄청 이상하진 않겠지? 이런저런 생각에 결국 나도 같은 메뉴를 주문했다. 커피는 다행히 쓰지 않고 맛이 좋았는데, 사실 맛보다는 머릿속으로 '오~ 다음부터 커피숍에 가면 무조건 아이리쉬 커피만 시키자. 그러면 어색하지 않을 수 있겠어'라는 생각만 가득했다.
그렇게 시작된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의 대화는 놀라움과 부러움의 연속이었다. 일단 <나이아가라>로 날 부른 것부터, 아이리쉬 커피만 마시는 취향부터 나보다 한참 어른 같았던 친구는 이야기하다 보니 학교 성적도 나보다 훨씬 좋았다. 나와 달리 이과였던 친구는 "학교는 정했고, 컴공을 쓸지 물리학과를 쓸지 고민이야~ 재미있기는 물리가 재미있는데 말이지~ㅎㅎ"라고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했다. 지금이야 온통 의대 세상이지만 당시만 해도 진학지도표 맨 상단에 있던 학과들은 물리학, 컴퓨터공학, 항공우주공학 이런 것들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열심히 수능 공부를 하는 친구가 이런 커피숍은 또 언제 와봤단 말인가?
"아, 여기는 애인이랑 몇 번 와봤지~ 오늘도 빌려줬던 클래식 씨디 받으러 나온 김에 너 보자고 한 거야. 내가 요즘에 모으는 연주자 앨범이 있는데, 너 DECCA라고 알지? 이게 음질이~"
친구는 이렇게 이야기하며 클래식 씨디가 가득 담긴 '전용가방'을 보여줬다. '세상에 애인도 있고, 음악도 클래식을 듣는다니! DECAA는 또 뭔데!?' 이제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큰 사람처럼만 보였다. 나는 막연히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 장난이나 치고, 수다나 떨고, 분식집 쫄면이나 나눠 먹고, 고3 화이팅! 이러고 집에 올 줄 알았지, 이렇게 뭔지 모를 패배감과 부러움 같은 걸 느끼게 될 거라곤 생각도 못 했다. 그렇게 한 참을 부러워만 하다가 집에 돌아왔지만 기분이 나쁘다거나 그렇지는 않았다. 친구도 뭔가 악의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나도 오랜만에 만나서 무척 반가웠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저 그렇게 여유 있는 모습이 많이 부러웠고, 친구가 그렇게 어른스러워질 동안 여전히 애 같았던 내가 좀 많이 한심해 보였을 뿐이다. 나도 남은 고3 기간을 열심히 잘 보내서 나중에 서울에서 다시 보게 되면 나에게도 저런 여유가 생겼으면 좋겠다는 바람만 있을 뿐이었다.
물론 나중에 대학에 가서 그 친구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그때의 호언장담과 달리 엉뚱하게 다른 학교 의대를 간 그 친구는 수능 망쳐서 죽을 뻔했다고 너스레를 떨며 '그거 다 허세였지~!'라고 껄껄 웃어대는 바람에 뭔가 배신감이 들었던 거 같다. 그 배신감에 가끔 볼 때마다 늘 뭐라고 하곤 했는데, 어느 순간 몇 년 전 일로 계속 뭐라 하는 내가 더 유치하다고 느껴졌다. 오히려 더욱 더 수더분해진 친구가 허세 가득한 고3의 모습보다는 훨씬 더 잘 어울리고, 더 어른스럽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 이 후로 꽤 오랫동안, 나는 커피숍에 가면 진짜로 항상 아이리쉬 커피만 시켰다. 누군가 "그게 뭐야?"라고 물어보면 옳다구나 하고 "이 커피는 말이지~"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는 것도 좋아했다. 시간이 갈수록 그게 그렇게 귀하고 특별한 메뉴도 아닌 게 되고, 입구에 설탕을 묻혀주는 '진짜배기' 집도 많이 줄었지만, 그래도 아이리쉬 커피는 내게 그 시절의 향수 같은 거였다. 지금이야 카페에 가면 주구장창 아메리카노만 주문하지만, 어딘가 예스러운 진짜 ‘커피숍’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곳을 만나면 옛 기억에 메뉴판을 뒤적이게 된다. 까까머리에 커피숍 처음 온 고등학생의 긴장감과 고3의 막연한 두려움이 허세로 폭발했던 친구의 귀여운 모습이 떠오르는 어린 시절의 기억. 지금은 미국에 살고 있는 그 친구가 여전히 추운 겨울에 아이리쉬 커피를 즐겨 마시는지는 잘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