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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영 May 04. 2016

메스트르 여행법


요즈음의 꿈이라면,
지니고 있는 차에 밥해먹을 간단한 취사 도구와 쌀 조금, 
오래 먹어도 괜찮을 밑반찬 약간과 라면 몇 개를 지닌 채 훌쩍 떠나는 일이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지금 한 열흘 쯤 여기저기 다녀보는 것, 
그러다가 좋은 들판 만나면 차세우고  나무 그늘 알맞은 곳에 앉아서 
하염없이 너른 들판을 바라보는 것, 
잠언처럼 명료하지 않는,

들판보다야 못하지만

나름대로 오래 산 사람이 
삶에 대해 적은 글 두세 권도 필수이겠다.

그러자면 차에 커튼도 만들어야 하고 등도 하나 준비해야 하고 
에베레스트에 가서 잠을 자도 춥지 않을 오리털 침낭도 하나 사야하고 
무엇보다 시골 들판에 차를 세워 놓고 자다가
무서운 짐승이나 무서운 사람을 만날까 무서우니 
시골 파출소 앞마당에 주차를 하는 것은 어떨까,

설명하기가 참 복잡하겠다. 
순경: 어디 가시는 길이시오? 나: 아무데 나요, 순경, 무엇 때문에? 나: 그냥요,:
질문겸 홀소리,

모텔에서 자는 것이 더 나을 텐데.... 
아, 저어기, (돈이 없어서....라는 뉘앙스를 풍기는 것이 편하다. 
사실 돈 주고 남이 덥던 이불 덥는 것 보다는 허리가 조금 불편한 것이 훨씬 더 나으니,) 

아, 알아서 하슈,..... 
허락을 한 뒤에도 순경아저씨는 자기 동료에게 이야기 하질 않겠는가, 
저기 이상한 아지매가 하나 왔어, 바람 든 사람 같아.

설령 내 귀에 들리지 않더라도

내내 그 사람 말이 귀에 쟁쟁해서 책두  잘 안 읽어지고 잠도 쉬 오지 않을 것이다. 

이런 소심함 때문에 나는 오늘도 떠나지 못한다. 
대신 빈차에 오후 햇빛을 가득 싣고 강화로 간다. 
차츰 비어져 가는 들판에 가을 햇살이 눈부시게 풍성하다.  
늦가을 햇살은 어느 계절보다 길고 가늘면서도 맑다. 
사물의 이면 속을 거침없이 투과해 가는 광선이다.  
차가 없는 한적한 길에서는 아주 느리게 가다 서다를 반복하며 
가을 들녘을 바라다본다.  

청련사. 표지를 보는 순간 핸들의 방향을 튼다. 
높지도 가파르지도 않는 조그마한 산길에서 말라가는 나뭇잎 냄새가 그득하다. 
크고 작은 잎들의 습기가 투명한 공기 속에서 형체를 지닌 채 부유하다가 
코 속으로 스며 들어오는 듯하다.  
나는 그들을 

'소멸에 대한 회한의 향기'라고 이름 붙여 본다.



예수쟁이인 내가 절에 가는 이유는 단 하나다. 
그곳에서 만나는 숲과 나무 때문이다. 청련사 역시 그런 날 실망시키지 않는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조금쯤 걸어 올라가자 
거대한, 우람한, 그러면서도 잔잔하기 그지없는 
느티나무 한그루가 표표히 서서 나를 바라다본다. 
저물어가는 햇살이 옆으로 길게 새어 들어와 
오히려 나무에게 신비로운 음영을 드리워주고 있다. 
그는 금빛 햇살에 아랫도리를 환하게 밝힌 채 나를 반겨 맞는다. 
수줍으면서도 당당하게 그러면서도 진지한 눈빛으로 날 관찰한다. 

설마, 혹시,  당신, 
나무와의 상견례시 당신만 나무를 바라본다고 생각지는 않으시겠지., 
오히려 나무는 오래 산자의 홀연함과 세월을 견딘 자만이 지을 수 있는 
원숙한 시선으로 당신을 깊게 은근하게 바라볼지니, 
나무와 조우할 때 너무 많은 욕심을 내서도 안 될 일이다. 
아니 낸다고 한들 도무지 무람없는 일이 될 것이다. 

존 러스킨도 뎃생을 아주 못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뎃생을 해야 하는 이유는 
‘잘 그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보는 법을 알기 위해서“라고 했다.그가 적은 뎃생에 대한 이야기는 삶에 대한 이야기로 확장되기에 충분하다. 
물론 나무에 대한 이야기로도 그윽하기 그지없다. 
그리하여 이제 나는 안다.

나무를 본다고 해서 전부 나무를  보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삼백년이 넘는 시간을 한결같이 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고 생각해보라.
봄이 오면 여린 싹 젊은 엄마처럼 내어내고 여름엔 무성한 젖으로 키워내고, 
가을이면 땅으로 무참하게 돌려보내는 
그리고 차가운 겨울을 신음소리 한번 없이 꿋꿋하게 버티는 아름다운 인내의 제왕,
아득한 나무의 우듬지를 알 것인가, 자라나는 가지의 결을 알 것인가, 
상처 나고 짓물렀던 곳에 생살이 돋아난 의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저 푸르렀던 나뭇잎의 생을 알 것인가. 
노오랗게 변해가며 펄럭이며 져내리는 슬픔을 알것인가, 
땅속 고요한 곳에 자리하고 서서 침묵의 몸짓으로 저 거대한
몸을 지탱하고 있는 뿌리의 힘을 혹 꿈이라도 꿀 수 있을 것인가,
힘겹게 땅으로 솟아난 나무의 뿌리위에 살풋한 늦가을의 이불이 되어주는 
상냥한 이파리,
그러나 아직도 싱싱하게 숨을 쉬는 연초록, 진초록 잎새들, 
물들어가는 노랑 단풍잎이 빚어낸 놀라운 조화로움 앞에서 
나는 서슴없이 그의 제자가 된다. 

메스트르는 돈 없는 혹은 돈 안 드는 여행의 미덕을 
우리에게 처음으로 깨닫게 해준 사람이다. 
그가 쓴 ‘내 방 여행’은 단어 그대로 방안에서 하는, 그러나 끝없는  여행이다. 
그는 당연히 여행의 목적지보다는 여행하는 심리에 의해 
여행이 좌우될 수 있다고 여겼다. 
그는 사람들을 피해 은둔할 구석방이 없다면 얼마나 슬프고 절망적일까, 


메스트르의  골방과

나의 나무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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