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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영 May 23. 2016

찔레꽃 머리

       여름이 시작되는

오늘은 찔레꽃머리의 시간이다.

그냥 그렇게 정했다. 

우리 동네 찔레꽃이 오늘 아주 만개했으므로.


여름이 시작되는 시간 초여름의 시작을 찔레꽃 머리로

바라보았던 아주 오래전 사람 누군가는 

아마도 초록 이파리 사이에서 하얗게 피어난 찔레꽃을 보며

그 시원한 모습에서 오히려 여름의 정한을 읽었을 것이다.  

아파트 담곁으로 주욱 심어져 있는 쥐똥나무와

길가 쪽으로 자꾸만 손짓을 하는 찔레꽃 담은 참 마음에 든다.

쥐똥나무는 이제 먹음기 시작했지만 찔레꽃은 눈부시게 피어나 있다. 

오월의 훈풍(열풍)이 들고 지나가면 다가오는 듯 마는 듯 옅은 향기는

관심 있는 자에게만 다가오는 향기이다. ... 

그러고 보면 꽃도 일종의 독서가 아닐찌,

읽는 자에게만 읽혀지는,

보는 자에게만 보이는, 


무슨 이야기냐면,

최초의 작가는 역사상 처음으로 ‘사랑하는 독자들에게’라는 표현을 사용한 

수메르인 제사장 ‘엔헤두아나’이다. 

자신의 노래를 듣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그녀는 그들을 사랑하는 독자들에게.......라고 표현한 것이다. 

이 단순한 어휘는 타인을 의식하고 

그 타인을 배려한 통찰력이라고 할 수 있다. 

엔헤두아나 전에도 노래라는 행위를 통한 예술성과 함께 정보를 나누는 

독서 행위가 왜 없었으랴. 

그러나 아무도 엔헤두아나처럼 

‘사랑하는 독자들에게’ 라는 객관적인 어조로 독자를 의식하거나 구분하지 않았다. 

습관이나 타성에 젖은 일들에서 새로운 이론을 창출해 내기는 쉽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수메르의 제사장 ‘엔헤두아나’는 

섬세하면서도 깊은 통찰력을 겸한 여자였을 것이다.  

로버트 망구엘이 쓴 <독서의 역사>에는


아키텐의 엘레아노르 왕비 무덤 덮개에 새겨진 조각 사진이 한 장 나온다.

왕비가 누워서 책을 들고 읽고 있는 조각이다. (누움은 아마도 죽음의 의미일 것이다)

망구엘은 아주 단순하게 조각을 풀이한다. 

“그녀는 사후에도 계속에서 책을 읽고 있다.”

그러니까 이런 문장은 사실이 아니면서도 

오히려 어떤 사실보다 더한 사실적인 사고를 하게 한다.

 

진리는 혹시 이런 비의 가운데 무수하게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  

엔헤두아나 보다 훨씬 전의 사람, 

우리가 전혀 알지 못한 그 누군가는 

진흙 조각에 10마리의 염소와 양을 상징하는 기호를 새겨 넣어 최초의 독서가가 된다. 

숫자도 글자도 그림도 없던 시절이다. 

그가 그린 아주 단순한 기호는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아주 거대한 문이었다. 

그는 어느 날 아주 우연히 그 문을 발견했고 

사람들에게 문을 열어보였다. 

문안의 세상에서는 느낌으로만 알아지던 모든 것들이 표현되어지고 

눈으로 보이고 어느 것은 만져지기 까지 했다. 

아마도 그는 그가 발견한 문이 인류의 역사를 새로 쓰는 거대한 문이란 것을 

꿈조차 꾸지 못했을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책 읽는 행위를 반대하는 주장을 펼쳤다고 한다. 

왜냐면 ‘책’이란 스스로 말하는 것들을 설명하지 못하고 

같은 내용만을 되풀이하는 쓸모없는 도구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말로서 교육하고, 말로서 글을 쓰는 혹은 말로 역사를 만들어가는 시대에 살았던 

지식인의 지식이 경이로우면서도 재미있다. 

그러면서도 일견, 책을 폄하 하는 것과 같은 태도 속에 

오히려 책에 대한 존숭감이 그득 배어 있지 않은가? 

놀라울만한 지성적인 의인화가 아닌가?


알렉산더 대제 시절에는 누구나 다 큰소리로 글을 읽었다. 

책이 귀했던 탓이기도 했을 것이고 

글을 아는 사람이 적은 탓도 있었으리라. 

알렉산더 대제는 자신의 군인들 앞에서 어머니의 편지를 소리 없이 읽었다. 

군인들은 무척 당혹스러워 했다. 

도대체 우리들의 대왕, 저 힘있고 능력 있으신 분이 하는 저 태도는 도대체 무엇인가? 

아니 글을 소리 없이 읽다니, 

도대체 저런 행위가 가능하다는 말인가?  

아마 지금 누군가가 너무나 아름다운 시를 읽다가 

그 운률에 젖고자 공원 나무 벤취 아래서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홀로 시를 읊었다고 치자. 

그 순간 어느 누군가가 그를 바라본다면, 

음, 조현증 환자가.....하며 그를 피해

조금 멀더라도 다른 길을 찾아 되돌아가리라. 

이 무렵 비잔티움의 아리스토파네스가 구두점을 처음으로 발견한다. 

그러니까 그 이전의 글들은 도대체 끝도 없이 시작도 없이 

줄줄이 이어지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지금 우리의 글을 가만 바라보라. 

마침표가 없는 글을 상상해 보라. 

마침표를 몰랐던 시절로 되돌아가보라. 

작은 점 하나가 거대한 레테강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런 지점에 서면

독서는 단순히 독서가 아닌 것을 알게 된다. 

독서는 역사이면서 상상이며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상상해 낼 수 있는 

모든 것들의 시작이며 끝이다. 

나는 역사가운데 서있는 나를 바라보게 되고

내가 서있는 곳의, 때의, 나의, 시원을 의식하게 된다. 

의식과 인지가 아무런 힘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의식과 인지 앞에 서슴없이 무릎을 꿇게 된다. 

230년 왕은 칙령을 내린다. 알렉산더를 통과하는 모든 배들은 책을 싣고 있을 경우 

이 도시의 도서관에 복사하여 소장할 수 있도록 책들을 모조리 내놓을 것을, 

정보에 대한 열정이 느껴지는 대목이기도 하며 

타문화에 대한 강력한 수용력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 당시 50여만 권의 장서를 지닌 전 세계에서 가장 큰 도서관은 

실수로 태어난 작은 불줄기에 의해 잿더미가 되어버렸다. 


거대한 도서관과 장서의 사라짐 속에서 

인류의 사라짐을 엿보는 것은 내가 니힐리스트 이기 때문인가? 

1000년경 페르시아의 수상으로 탐욕스런 독서가였던 압둘카셈 이스마엘은 

여행을 하면서도 11만 칠천 권에 달하는 책들과 헤어지기 싫어서 

400마리나 되는 낙타를 알파벳순으로 걷도록 훈련을 시켜 

가는 곳 마다 끌고 다녔다고 한다. 

세상에,

긴 석양빛을 따라 책을 등에 지고 천천히 걷는 낙타들의 움직임을 상상해보라. 

자연 그대로의 움직이는 도서관, 

그 장렬한 아름다움이 혹시^^* 이동도서관의 효시가 아닌가?


하이퍼텍스트라는 단어에는 속도와 함께 은밀한 자유가 있다. 

1996년 미 의회 도서관의 장서는 일억 권을 돌파했다. 

1995년 한 해에만 357.437권이 추가 되었다고 하는데 

유네스코에서는 여전히 세계의 문맹률이 20%를 상회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로버트 망구엘의 ‘독서의 역사’속에서 만나는 많은 독서가들은 

의외로 공간의 제약뿐 아니라 시간의 제약도 민감하게 받는 약한 감정의 소유자들이다. 

마르그리트 뒤라스는 햇빛과 책이 뿜어내는 빛을 견딜 수 없어서 

해변이나 정원에서는 도대체 책을 읽지 않는다고 고백했다 .

프랑스의 소설가 콜레트는 고양이 팡세트와 함께 

아버지의 안락의자에 앉을 수 있을 때 까지는 

미술레의 프랑스사를 읽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책을 침대로 가져간다’는 일상적인 문구에 로버트 망구엘은 

언제나 관능적인 기대를 한다고 적고 있다.

물론 관능에 대한 전혀 다른 새로운 해석과 

오히려 관능이 지닌 단순 협소함을 지나 깊고 그윽한 확장의 새로운 지평이 열린다. 

과거의 기억이란 것은 삼베에 치잣빛 염색하는 것처럼 빠르고 손쉬워 

그 감도가 언제나 정확하지 않다. 

더불어 그 삼베에서 치잣빛 새나가듯이 숭숭 새어나가거나 

그 사이로 다른 사건들이 슬며시 스며들기도 한다. 


망구엘의 관능적인 기대와는 조금 다른 방향일지 몰라도 

하여간 그 관능적인 기대감이라는 문장 속에서 

기억 되어지는 독서체험이 내게도 있다.  

사촌언니는 나보다 네 살 위였는데 글을 읽을 줄 몰랐다. 

학교를 다니긴 다니는데 문맹이었다. 

나는 아마 초등 이학년? 삼학년? 

그 언니와 나는 골방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책을 읽었다. 

나의 조근조근한 목소리를 언니는 들으며 가만히 이불 한 귀퉁이를 들고 있었다. 

너무 어두우면 글이 안보이니까, 

누우런 갱지에 세로줄 글자가 적혀있는 사이사이 

치마를 헐겁게 입은 여자 그림이 그려져 있다. 

생리, 월경이란 낯설고 생경한 그러나 왠지 어둡고 신비로운 동굴 같은 단어가 

내 입술에서 궁글려졌다. 

아무런 스토리도 기억나지 않는 그 글이 관능적이었을 거라는 추측은 

작은오빠의 행동 때문이었다. 

어느 순간 이불은 들쳐지고 작은오빠는 내가 읽던 책을 빼앗았다. 

그리고 뭐라 소리를 지르며 그 책을 던져버렸다. 

그 골방 앞에는 연탄이 가득 쌓여 있었는데 책은 연탄 뒤로 떨어졌다. 

이상도 하지, 그 책에 꺼먼 연탄이 묻을 거라는 생각은 지금도 선명하니, 

혹시 그 책은 작은 오빠 책이었을까?

읽을 책이 없으면 아부지 월마다 가져오시던 ‘지방행정’ 책 뒤의 소설까지

읽어내는 글자에 대한 지향성의 시작이 혹시 그즈음이었을까, 

비위 상한 인체 모형을 본 후 밥을 못 먹다가 

무엇인가를 읽어대며 밥을 먹기 시작한 시절보다 더 오래 전이니....   


동무여 이건 책이 아닐세

이걸 건드리는 이는 사람을 건드리는 것일세

(지금 밤인가? 여기 홀로인가?)

그대가 잡은 것, 그리고 그대를 붙잡는 것은 나일세

나는 책장에서 그대 두 팔로 튀어 안기네 <윌트 휘트먼> 


꽃 한 송이

책 한 권은 근수가 같을것이다.

아마도 내 생각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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