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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용가

처용의 편지

by 위영

사람들은 언제나
자기가 보고자 하는 면만을 보는
일종의 斜視들이야.

사시에도
상사사 하사시 외사시 내사시가 있대내.
그 방향에 따라 그리 이름 붙인 거지.

사시라 하여 두 눈 다 그럴까?
아니지.
한 눈은 정상인데
다른 한 눈이 원하는 방향으로 향하질 못한다는 거지.

그것 참,

사람들 참 이상도 하지

그렇게나 다른 것 새로운 것들은 찾아내고 좋아하면서

몸 좀 다른 것은 왜 그리 못 견뎌하는지,

양 팔 양다리 조금 달라도 유심히 보고

손가락 하나만 달라도 왜 그리 눈을 반짝 뜨는지,
눈 하나가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하여

머 어때,

사실 몸이 조금 다른 것이나

눈의 사시라면 큰 문제가 아니야,

문제는
정서랄지, 생각이랄지, 타인과의 관계랄지,
이런 미묘한 분야에
사시가 들어가 좌정하고 있다면
이게 문제가 된다는 거지.

예를 들어
나 처용.

원래 용왕의 아들이었어.
그렇지 그때만 해도
지금 보다는 모든 것이 자유로웠기 때문에
용왕의 아들이라 하여
땅 위 조그마한 신라 나라 왕 앞에서
춤을 춘다 하여 흉될 것은 없었지.


흉이라니
오히려
작은 자 큰 자 앞에서 너그러웠고 큰 자 작은 자 앞에서 오히려 겸손한 시대였으니
그러니 내 즐기는 춤,
그 앞에서 추어
그 즐겁다 여기면
그 또한 내 기쁨일 터....
(그래 지금과는 아주 다른 시대였지. 정말 투란토트나 아이다 즐길 수 있는데,

비싸서 못가는 이 시대와는 다르지. 돈이나 지위보다는

즐길 수 있는 자 앞에서 즐기게 하는 것, 그것이 그 시대의 예술이었으니깐.)

춤을 아는 자더군.
그 헌강왕은.
그가 좋아서 용궁 버리고 그를 따라왔어.
울 아버지한테는 나 말고도 아들
여섯 명이나 더 있었으니까....

그리하여 어여쁜 아내도 얻고,
날마다 내 좋아하는 춤을 추며
젊은이들에게 춤을 가르쳤지.

가끔 드물게 몸으로 하는 일들을
하찮게 여기는
우스꽝스러운 무리들이 있는데
그것들
철들어 보라지.
몸으로 하는 일들이
얼마나 구수하고 아름다운지 알게 될 터이니....
근데 그땐 사실 이미 늦어있지.
하고 싶어도 아무리 원해도 아마도 몸이 이미 그를 배반 한 뒤일 거야.

그날 밤 달

차암 환하고 밝더군.
달이 밝으면 세상 요요해지지..

댓 이파리 흔들거리는 모양도 댓 이파리 그림자도

바로 수묵화가 되거든,

달의 밝고 오묘한 기운이 온누리에 색다른 숨결을 쏟아낸 탓이지.
나라고 달랐을까,

몸 안 깊은 곳에 숨어있던 남모르는 춤사위까지 달빛이 불러 내는 듯

내가 부유하고 있는 건지
도무지 발이 땅에 닿아 있는 것 같지가 않더군..

유별나게 춤을 받는 날이었어.

달 중천에서 뉘엿뉘엿 져갈때서야
사람들
하나 둘 사라지더군
나도
집으로 돌아왔어.
소진된 걸음걸이로......

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내 어여쁜 아내
깊이 잠들어 있을 것 같아
아주 가만히 대문 열고 마당으로 들어섰지.
달빛 여전히 휘황히
마당에 그득히 쏟아져 내리고....
춤으로 다아 소쇄된
내 몸과 마음.
그리고 마지막 남은 영혼은
저물어가는 달빛이 다아 씻어주는 것 같았지.

달빛 기다랗게
마루 위에 스며들고

그 달빛 위로 일렁거리는 감나무 그림자 정다이 노닐고
그 마루 지나
방문 고리 슬쩍 잡으니
문 배시시 열리네.
황홀한 달빛 방에도 눈부시게 내리비쳐
어여쁜 아내의 다리 쪽 비추이는데

오메!!!
다리가 두 개가 아니라 네 개네.
내 어여쁜 아내의 다리가 네 개였던가?
아니 그럴 리 없지.
그리고 저 다리 두 개는 털이 부숭부숭 났구먼....
그렇다면.....

침착해야지 싶었지.
우선 저 달빛
저리 참하고 밝은데
저 달빛 아래서
잠시 생각을 가다듬어야지.
생각을 모으기 위해서 다시 달빛 가득히 내비치는
마당으로 내려섰어.

갑자기
온몸에 격렬한 통증이 일기 시작하는데
견딜 수가 없었어.
몸이 저절로 움직이기 시작하더군.
달빛은
덩더꿍 덩 덩쿵,
북치는 소리를 내 귀에 담아 보내고
내 몸은 고통을 이기노라
벌 숨 벌 숨
숨 쉬어 대고.....

..........
동경 밝은 달에 밤새 노닐다가
집에 들어와 자리 보니 가랑이가 넷이어라
둘은 내 것인데 둘은 누구 것인고
본디 내 것 이건만 빼았겼음을 어이할꼬?///
..........

천연두 귀신이
험상궂게 생긴 모습으로 변하여서
내게 절을 하더군.
공의 아내가 하 어여뻐서 내 범했는데
공께서는
노여워하지 않고
춤을 추시며
시를 지으시니.
이제 공의 얼굴만 보여도
난 그 집에 들어가지 않겠어요.


사람에게만 사시가 있는 게 아니더군.
역신에게도 사시 있어.
내 고통 이기려고
춤추었거늘
내 분노 이기려고
창에 담았거늘
그리 바라보 난다?

혹자는
이리도 말하더군.
춤의 승화라고....

승화는 매우 전문적인 단어야.
깊지 않으면 이룰 수 없지.

예를 들어
이창동인가 머신가 영화 만드는 감독,

장관은 잊혀도 영화는 남지,
창부라는 단어를
영화에 슬쩍 걸쳐서 설왕설래하는 것도.
그 친구 참 영화를 사랑해서
그런 단어를 쓸 수 있지 않았을까 싶어.
그 친구
오아시스 만들 때
그 밑에서 일하던 친구가 영화 만드는 이야기를 주욱? 는데
이창동 감독 보고
<도 닦는 것 같다>
머 그런 표현을 썼더군.
너무도 진지하게 영화를 만들어서.......
그러니
그런 단어를 쓸 수 있지 않을까 싶었어.

오아시스 영화 본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그 영화 가슴속에 간직하고 있는
나.
(나가 누구여? 처용이여? 위영이여?)
가 보는 관점으론 말이지..

사랑하니
함부로 말할 수 있었겠지.
사랑하지 않았다면
조심스럽고 예의 바르게 말했겠지.


사시적 관점이고 말고,

봄비 오시는 아침이네.

저 비에 조금 남은 겨울 먼지 말갛게 씻겨나겠네.

먼지 없는 나뭇가지

아주 맑은 곳

그 어디쯤

어린아이 새순

그보다 더 여린 꽃순

봄비 간지럽다며 옴지락거리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