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위영 Jul 11. 2017

괄호와 모서리

박수현이란 시인이 쓴 ( ) 괄호란 시이다. 

****

나는 기간제 교사다 육아 휴직한 어느 젊은 여교사의 그림자인 나는 교사 명단란에도 

그녀의 이름 옆 ( ) 속에 갇혀있다 ( )인 나는 십 년을 일해도 백 년을 일해도 

근무 연한 5년 차까지만 인정받는다 성과급 지급은 물론 공무원증도 발급되지 않는다 

전자문서 결재란에도 급여 명세서에도 따라붙는 기간제라는 말 교무회의에서도 

( ) 속을 벗어나지 못하는 내 목소리는 그들에게는 들리지 않는다 

눈도, 귀도, 가슴도 없이, 그저 괄호인, (하략)*

**** 


( ) 속으로 들어가 있는 기간제 교사는 아마도 시인일 것이다. 

그래서 이시는 매우 사실적이다. 

사실적이면서도 ( ) 안의 생활인이라선지 

삶의 정한이 가열하게 흐른다.

그러나 어디 기간제 교사만 ( )에 갇혀 있으랴.

아마 시인도 인생 자체를 ( )로 읽었을 것이다.  


나이 들어가면서 어느 순간 시력이 달라지나 

(低下와는 매우 다른 뜻으로 

가까운 사물이 잘 보이질 않는 遠視의 증상은 

주위의 사소함에 대범하라는 뜻으로 읽어도 가할 듯)

그 달라짐 사이에서 안보였던 것들이 보이는 경우가 생기더라는 말씀이다.

허리를 굽히거나 가까이 다가가지 않으면 절대 보이지 않는 주름잎은 

이른 봄부터 가을까지 쉴 새도 없이 피고 지는 것을 

들꽃에 관심 없는 사람은 바로 발밑에 있어도 혹은 짓이기면서도 절대 모른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아주 단순한 문장을 차용한다면 

이즈음 내게 ( )가 새로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은 

( )가 지닌 속내가 편하게 여겨지기 시작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어찌 보면 글에서의 ( )는 

설명이거나 변명일 수도 있으며 

민망하지만 어쩔 수 없이 보여주어야 하는, 

그렇지 않으면 전혀 다른 방향의 오도가 일어날까 싶은 

노파심의 배양터가 바로 ( ) 일 수도 있다. 

내숭 섞인 진심이라고 해도 무방하며 사람의 체면을 깎을 수도 있으나 

반대로 사람의 면을 세워주기 위한 배려있는 기호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무엇보다 ( )는 스스로 선택한 ‘왕따’가 거하는 곳이기도 하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아닌 스스로가 선택한 공간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 )라는 공간 속에 거할 때 

비교적 자족할 수 있으며 비교적 자유로울 수도 있다.  

소설과 삶의 근본적인 가치 지향점은 “사람”이다.

우리네 삶 속에서도 무수한 사람을 만나는데, 

그 사람을 더 많이 못 만나서 

아니 더 많이 만나고 싶어서 읽는 책이 바로 소설이다.


그렇다면 실제 삶 속에서 무수한 “사람”을 만나면서도 

소설 속에서의 “사람”을 읽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오래된 느티나무 가지들처럼 수많은 답이 있겠지만 

오늘 내가 치켜들고 싶은 가지 하나는 이렇다. 

“사람” 즉 타인을 통해 자신을 바라보는 것, 

예컨대 소설 속의 “사람”은 현실 속의 사람

(물론 가장 중요한 시점은 나)을 투명하게 비추어내는 색경이라는 것이다.

(色鏡은 거울의 사투리로 색깔 그대로를 보이게 하는 거울이니 실제 거울보다 뜻이 더 진한 듯) 


*모서리에서의 인생 독법*이란 김원우의 글에서 

글의 주인공 박 선생을 만나려면 

혹은 이해하려면 상당히 깊은 삶의 관조가 필수이다. 

더불어 지루함을 견뎌내는 느긋한 인내심도 절대 선택 사항이 아니다. 

그런 정신적인 것뿐만 아니라 

신체적 눈 운동도 위아래로 수시로 해가며 읽어야 되는데

(모르는 단어가 상시 출몰하여, 페이지 하단의 해석을 읽어야 이해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열심히 노력을 해도 박 선생은 얼른 우리 앞에 현현하지 않는다.

(이런 대목에서 심각하게 생각해보는데 이런 것이 작가의 고도화된 노회 함인가, 

아니면 삶이라는 한 양태를 보여주는 융숭한 사색의 결말인지가. 음 헷갈려) 

박 선생이 우리 앞에 등장을 한다고 해서 그를 이해할 수 있는가 하면 역시 그렇지도 않다.

그는 익숙한 우리식 삶의 방법

(타인의 시선을 매우 의식하는, 

타인의 시선 속에서 오히려 실존감을 느끼는, 

스스로의 느낌보다는 타인의 지나가는 말 한마디를 곰곰 되씹는 관계지향적인 삶의 방법,

한마디로 매우 속물적인)을 그는 의식하지 않는다. 

그럴 수 있을까? 그만의 치열한 삶을 전개한다.

(김원우가 자주 그리는 전쟁의 상흔은 여기서도 예외 없이 존재한다. 

전쟁이라는 괴물의 발걸음은 공룡의 그것처럼 

깊게 파여서 이론이나 서정이 들어갈 틈이 없는 커다란 空洞이다. 

이 공동은 공동을 모르는 세대와는 

말 그대로 공동이라는 거대한 굴을 사이에 두고 

존재하게 될 수밖에 없다. 

거기다가 모든 인생이 그렇듯이 

이 괴물의 발걸음 역시 상황에 따라 공간에 따라 너무나 다른 모습이기에 

같은 세대를 걸어온 이라 할지라도 

혹은 그 공동 안에서 사는 본인 자신이라 할지라도 

객관화되지 않은 혹은 될 수 없는 세계이기도 한 것이다.)


글의 골조는 박 선생과 제자인 여박사. 최박사.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 세 사람을 관전하는 나

(소설을 쓰다 작파하고 고향인 D시에 내려가서 사는 교수) 


이 네 사람의 삶의 양태는 모두들 현저히 다르다.

(아, 삶의 양태가 다른 건지, 살아온 삶의 방법이 다른 건지, 혹은 태생이 다를 수도 있다. 

그래서 인생판 역시 바둑판처럼 역사 이래로 같은 판이 절대 벌어지지 않는 것이다.) 

관전하는 나는 깊은 사유와 통찰력을 지닌 

그래서 끊임없이 자신의 몸에 붙어 있는 

지적 허영 지적 오만, 지적 속물성을 털어내노라 여념이 없다. 

그는 삶을 날카롭게 바라본다. 

그러면서도 부드럽다. 

남의 허실도 자신의 허실에게도 투명하다. 

그는 가장 박 선생을 잘 이해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여박사는 매끄럽고 세련된 지성인이다. 

그러면서도 좋은 집안에서 좋은 환경에서 잘 자라난 사람들이 그러하듯 머리 도는 것도 윤택하다.

더불어 자신이 무식하다는 것을 아는, 

의술이 자동차 정비 술과 같다는 것 정도는 통찰해내는 

즉 유무식의 경계를 아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래서 완전히 천격은 아니다. 


최박사는 정형외과 개업의다. 음악을 좋아하며 몰입할 줄도 아는, 

가끔 지적 허영기가 묻어 나오는 고백적 자성이 밉지 않은 인물이다. 

특히 스승인 박 선생의 감이 오지 않는(?) 삶을 들여다보며 힘들어할 줄도 아는

인간미를 지닌 사람이다. 


이 세 사람의 지적인 인물들이 똑 같이 바라보는 박 선생의 겉모습은 

한마디로 처량하고 궁상맞기 이를 데 없다. 

자리에 걸 맞추어 처신할 줄도 모르는 도대체 촌스러운 사람이다.

박 선생에 대한 가장 요긴한 증언을 한번 보자. 

“대 수술 중에 허기가 지면 피고 뭣이고 아무것도 안 보이신다고, 

우선 내가 살고 봐야 병자도 살릴 수 있을 텐데,...

(략) 수술하다 말고 뙤약볕에서 물에 만 보리밥을 양푼이째로 들이키는데 

조수가 동맥 수습도 제대로 못해서 피가 꿀렁꿀렁 쏟아지길래 밥숟가락을 집어던지기도 했다.....” 

이 대목을 작가는 이렇게 해석한다. 

어떤 처지에 놓이더라도 우선 당신의 몸부터 챙긴다.

(매우 얄팍한 인간성 없는 자질처럼 여겨진다)

환자의 안위는 나중이다

(나쁜 의사다)

만사 전폐하고 기아부터 해결하고 본다

(너무 즉물적이다. 좀 참을 수도 있지 않을까)

수술 같은 것은 생존의 전략일 뿐이다.

(세상에 수술자에게는 생명이 오고 가는 일인데)

당신의 의중 안 비치기, 

묵언을 앞세우고 속으로만 우물쭈물하기, 

환자, 의무, 봉사, 의술이야 어찌 됐든 나만이 전부라는 

무식하나 강인한 처세술 고수하기. 

결국 의사는 기술이다. 

인자한 처신과 정성스러운 치료행위는 생명을 담보로 환자의 지갑을 노리는 일방, 

내키지 않는 감사와 존경을 억지로 끌어내는 사기행각이다.

고 그는 생각한다.

(지금 우리가 의사에게서 원하는 미덕이 박 선생에게는 눈곱만큼도 없다. 


그러나 한걸음 더 나가면 

아니 반걸음만 조금 나가도 

우리가 원하는 것이 얼마나 얄팍하든지 그 얄팍하을 살짝 넘어서

바로 원조 ‘詐欺’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아, 난해하기 이를 데 없는 인간성 해석이여)  

고급하면서도 소박한 삶을 나타내는 

혹은 바라보는 혜안이 글 속에는 그득하다.

무엇보다도 사람을 바라볼 때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닌 

(오,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이시여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사)

그 속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그 만고 불변의 진리를 쾌활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무엇이 “사람‘의 기품인가.

과장이 없는, 

너스레가 없는 행위가 기품이다. 

촌스러워도 궁상맞아 보여도 

자신에게 가장 정직하면 이것이 바로 기품이다. 

(이 단순함 속에 깃든 기품이라니)


그러나 우리는 엉터리 해석으로 

선행의 제반 족적을 드러내려는 경거망동을 지니고 있는데 

작가는 이것이 

인간의 근본적이면서도 

숙명적인 한계라고 설파했다.  

(나는 근본적이고 숙명적인 한계인이다.)  

작가의 이전글 <기억>이라는 물체(?)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