生은 거의 드라이 합니다.
가뭄이 자주 다가오곤 하죠.
먼지가 폴폴 날리고 여기저기 푸석거립니다.
오란비를 기다리고 있지만 아직 우리 동네는 감감이군요.
작년 재작년 재재작년 겨울에도 눈이 없어 황무했습니다.
봄이면 운무 가득히 깔고 나즉하고 그윽하게 내리던 봄비도 오시지 않더군요.
비를 사랑하는, 마치 하늘의 은총처럼 비를 생각하는 저에겐 지루한 봄이었습니다.
칠월 한해의 반이 훌쩍 넘어가고 소나무 아래 원추리가 피어났지만 여전히 비는 귀합니다.
오란비 시간인데요.
저수지에 물이 흡족하게 차려면 1000mm정도 비가 내려야 한다는데.....
기도하는 마음에 기도하는 예수님 그림이 떠올랐습니다.
지오반니 벨리니(Giovanni Bellini, 1430-1516)의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입니다.
여명의 햇살이 비치는 세상은 평온하고 아름다워 보이는군요.
구름은 두둥실 떠올라 있고 푸르른 하늘은 희망에 차보입니다.
수많은 길들은 부드럽게 휘어져 있고 맑게 흐르는 강물은 풍요로워 보입니다.
저기 강물위의 다리도 아름답네요.
아 그런데....그 아름다운 다리 건너편에는
검은 옷의 유다가 예수님을 체포하려고 성전경비병들을 데려오고 있어요.
창과 방패를 들고 거칠고 사나운 모습으로 다가오네요.
유다는 뒤돌아서서 경비병들에게 말하고 있어요.
자신이 입 맞추는 사람이 예수님이다. 잘 해야 한다. 당부 하는 중일까요?
숫자가 많네요. 어두운 세력들은 거의 언제나 다수이고 다수는 그들에게 당위성을 부여하죠.
기독교인들이 유념해야 할 대목입니다.
소수이지만 담대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요.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슬퍼하시며 말씀하셨죠.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그런데 잠에 취해있는 세 사람 좀 보세요.
어쩌면 매일 육신에 지고 마는 딱 내 모습입니다.
태평스럽게 잠에 빠져 있는 것 같기도 하지만 사실 그 마음이 편하겠어요?
기도하라고 하셨는데..... 고달파 보이기도 합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죠,
예수님께서는 누워서 자는 베드로를 세 번이나 깨우시죠.
아직도 자니? 마치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던 베드로를 미리 보여주듯이 말이죠.
야고보와 요한은 앉아서 자고 있어요.
예수님 말씀을 기억하고 있네요. 그런데 지금 너무나 졸려서요. 하듯이 말이죠.
야고보는 예수님처럼 맨발입니다.
맨발은 많은 것을 상징해줍니다.
위태로운 운명과 거역할 수 없는 일, 깊은 고독과 헌신도 나타냅니다.
야고보는 열두 제자 중 가장 먼저 순교를 당했어요.
예수님께서 물으셨죠.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고,
야고보는 마실 수 있다고 대답했어요.
순교의 잔을 의미했을 거예요.
고뇌와 갈등 속에서 기도하는 예수님,
옷이 땀에 젖어 있어요.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막14:36)
그러나 하늘 위 천사는 고통의 잔을 내밀고 있네요.
종말을 의미하듯 이파리 하나 없는 말라있는 저 나무 좀 보세요.
아무리 큰 고통이라도 아버지의 뜻이라면-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사랑을 아는 예수님-
세상을 위한 사랑을 나타내주듯 예수님의 옷은 천상의 색인 블루와 사랑의 라의 색인 레드이네요.
그렇죠.
성경에서는 이 모든 일들이 어두운 밤에 이루어졌지만
벨리니는 이 슬프고 고뇌에 찬 장면을 해오름시간으로 표현한 거예요..
부활의 새벽을 형용한 거죠,
참 아름다운 새벽입니다.
혹자는 서양미술사중 가장 아름다운 새벽풍경이라고 여긴다고 해요.
사랑이 배신을 품어서 일까요?
어둠이 암흑을 이겨서일까요?
죽음을 이긴 사랑 때문이겠지요.
아침의 환한 햇살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어요.
오란비 시간입니다.
한해 필요한 비의 상당부분이 이 철에 내려 줘야 하는데....
장맛비 내리시면 푸석거리는 내 맘에도 그 빗줄기 내리시겠지요.
생이라는 드라이한 화분을 촉촉이 적셔줄 거예요.
예수님 등 뒤의 마른 나무처럼 비를 기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