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티아스 스토머 (Matthias Stomer, 1600-1650)
다음 주에 러시아로 선교여행을 가는데 상트페테르부르크도 갑니다.
유명한 에미르타쥐 박물관은 꼭 가보려고 해요.
의도한 것은 아닌데 지난달부터 바탕화면에 넣어놓고 바라보곤 하는 그림
‘야곱과 에서’도 에미르타쥐 박물관에 있다고 하니 더 기대됩니다.
마티아스 스토머는 네덜란드 사람인데
그가 1640년 즈음에 그린 ‘야곱과 에서’입니다
그는 성경 속 인물들을 자신만의 독특한 해석을 가미하여 많이 그렸어요.
특별한 설명 없이도 사람의 표정만으로 그 사람의 성정을 잘 나타내 주는 작가입니다.
그림의 구도는 단순하고 구성역시 단조롭습니다.
주제조차 너무나 익히 아는 팥죽 이야기인데도 이상하게 볼수록 흥미를 더해주는 작품입니다.
에서 좀 보세요.
한 손에는 자신이 사냥에서 잡아온 토끼를 자랑스레 치켜들고 있고
다른 한 손으로는 팥죽
(스튜가 정확한 번역이라고 하던데 렌틸콩으로 끓인 스튜면 어떻고 팥죽이면 또 어때요)
그릇을 움켜잡고 있네요.
딱 봐도 매우 현실적인 사람이죠.
눈에 보이는 것들만 좋아하는, 그것 외에 무슨 중요한 것이 있겠어, 나 토끼를 사냥해온 사람이야,
그런 내가 지금 피곤하고 배가 고프단 말이야. 지금 내겐 오직 팥죽이 필요할 뿐이야.
실제 에서가 말하죠.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오 (창 25:32)/
겨우 배가 좀 고픈 것을 가지고 죽게 되었다는 표현을 쓰는 에서.
통찰력은커녕 참을성도 없는 에서의 단순함을 확연히 드러내 줍니다.
전혀 미래를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란 거죠.
지금 오직 그의 관심은 팥죽에만 있어요.
소탐대실의 전형이라고나 할까요.
야곱은 영리한 표정으로 형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에서가 먹을 것에 매우 약하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겠지요.
아마 적절한 시간을 노렸을 거예요. 미리미리 준비했겠지요.
결국 야곱은 팥죽으로 장자의 권리를 사게 됩니다.
찬스에 강한 남자죠.
장자의 축복을 샀는데도 이상하게 야곱의 삶은 고난의 길입니다.
오죽하면 바로 앞에서 자신의 인생을 ‘험악했다’는 말로 정리를 했겠습니까,
내가 주님을 믿는데, 내가 기도하는데,
내가 이렇게 교회생활을 열심히 하는데, 왜? 왜? 내 삶은 이런 거지?
많은 기독인들이 갖게 되는 가장 단순한 물음,
왜? 에 대한 답은 야곱의 삶에 선명하게 나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축복과 하나님이 주신 축복과는 전혀 다른 선에 존재할 수도 있다는 것.
환하게 타오르는 촛불은 야곱과 에서를 환히 비춰주고 있습니다.
촛불이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기도 하네요.
지금은 저렇게 타오르고 있지만 순식간에 지나가는 우리네 젊음처럼 이내 사그라들겠지요.
식탁에 빵도 있군요.
더 자세히 보면 빵 아래 칼도 있어요.
혹시 야곱의 속마음을 나타내려고 작가가 일부러 넣은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작품의 백미는 저 여인입니다.
아니 저 여인의 시선입니다.
세월의 잔해가 가득한 얼굴이네요.
약삭빠른 야곱이 증인으로 옆에 세웠을 거예요.
그러니 주인공은 아니더라도 야곱에게는 매우 중요한 인물이죠.
그런데... 저 여인의 시선이 참으로 부담스럽습니다.
야곱이나 에서에게로 향해야 할 시선이 나를 바라보고 있어요.
그림 앞에 서있는 당신을 보고 있잖아요.
너라면 어쩌겠니?
아, 나의 선택을 묻고 있군요.
물론 당신의 선택도요.
난 절대 에서가 아니야,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수밖에 없네요.
당신은 확신할 수 있으세요?
난에서 같은 어리석은 선택은 안 할 거야.
단언하실 수 있으세요?
팔월은 염하炎夏입니다.
더위가 불꽃처럼 타오를 때이지만
그러나 가을의 시작점이기도 하죠.
모든 끝에 모든 시작이
모든 시작에 끝이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기도 하지요.
야곱과 에서의 그림에서
나를 바라보는 늙은 여인의 시선처럼 서늘해지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교단 신문 연재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