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바조,Michelangelo da Caravaggio 1608~9년,
다시 차가운 겨울 나라가 도래했습니다.
옷 벗은 나무는 쓸쓸하고 외로워 보입니다만 정말 그럴까요.
빈가지에 푸르른 하늘을 품다가 밤이 되면 가지에 달을 매답니다.
별은 나뭇가지에 걸쳐서 더욱 빛나고 있지요.
해 저물어갈 무렵이면 먼뎃 산의산그리메들조차 나뭇가지로 스며듭니다.
텅 빈 가지 사이로 보이는 풍경은 풍성하기 그지없습니다.
겨울나무는 녹음과 단풍을 그리워하거나 새순 나올 순간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 자신의 존재를 깊이 응시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겨울나무의 공평이 기적처럼 여겨지는 12월은 성탄時입니다.
고향이 카라바조라 카라바조로 불렸던 미켈란젤로 메르시의 ‘목자들의 경배’입니다.
카라바조는 바로크 미술의 문을 연 사람입니다.
그는 르네상스의 시대를 벗어나 그만의 방법으로 새로운 인생들을 그려냈습니다.
빛을 통해 명암을 극적으로 표현했고,
그 때 까지 그림의 대상이 되지 못하던 누추한 일상과 낮은 사람들을 불러내
오히려 거룩한 영역을 표현해냈습니다.
지저분하고 고단한 삶의 단면들을 숨김없이 드러냄으로써 ‘카라바지즘’을 만들었습니다.
깊은 밤입니다.
한데서, 밖에서, 광야에서 양떼를 지키던 목자들(누2:8)입니다.
다들 편안하게 집에서 쉴 시간에 그들은 들판에 있었습니다.
겨울나무처럼 쓸쓸할 것 같은 그들에게, 가난하고 외로운 그들에게, 소외된 그들에게,
주의 사자가 나타나 굿뉴스를 전합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누2:14)
그들은 빨리!(누2:16) 갑니다.
마리아와 요셉 그리고 구유에 누인 아기에게로.
모든 사람을 구하시려고 인카네이션 하신 아기예수님 앞에 그들은 섭니다.
그저 마구간입니다.
가브리엘 천사도 없고 하늘도 열리지 않습니다.
예수님 주변의 아우라도 없고 무지개는커녕 소가 먹다 남은 지푸라기가 어질러져 있습니다.
요셉이 들고 왔을 초라한 가방이 농기구와 함께 땅에 놓여 있습니다.
마리아는 아기를 낳은 후 지치고 피곤한 표정입니다.
소의 구유에 힘없이 기대어 있습니다.
아기의 볼에 볼을 댄 채 눈을 감고 있습니다.
종교미술의 상징으로 서로의 뺨을 맞대는 것은 고대 로마시대부터 죽은 사람과의 이별을 의미합니다.
아기예수와 뺨을 맞댄 마리아도 마찬가지로 수난의 어두운 예감을 했던 것일까요,
그러고보니 목자들은 마구간에 태어나신 아기 예수님과의 첫 만남에 가장 적합한 사람들 같기도 합니다.
초라하지만 순박하고 내세울 것 아무것도 없지만 진실한 사람 말입니다.
목자들의 표정을 보세요.
아, 예수님,
오 예수님이시군요.
세상에 예수님~
우리를 구원하러 오셨군요. 예수님....
그렇습니다. 저 그림 속에서 목자들은 오직 예수!!! 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기적도 필요 없고 화려한 장소나 고귀한 차림새도 필요 없습니다.
목자들은 저렇게 예수님을 바라보는데
나는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 것인지....
주님을 위해 드리는 것들,
시간과 노력과 헌신 속에
과연 목자들의 저 진심이, 저 깊은 응시가, 오직 주님만을 향한 믿음이 있는 건지...
저 자신에게 묻게 됩니다.
벨라스케스, 라 투르 램브란트...등 세기의 거장들도 카라바조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실제 그는 과격한 성격으로 감옥을 여러 번 들락거리기도 했으며
경기 중 시비 끝에 상대를 살해하고 도망자로 살다가
객지에서 말라리아에 걸려 쓸쓸히 생을 마감한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그의 그림은 어느 누구보다 더 사람을 흔드는 깊은 영성이 있습니다.
지적 사색이 아닌 내적 체험의 세계가 목자들의 경배에는 표현되어 있습니다.
기이한 일이기도 합니다.
올 한해를 어찌 보내셨습니까.
기쁘고 즐겁게 행복한 시간으로 가득 채우셨습니까.
외롭고 고달프게 힘든 시간을 지내셨습니까.
좋으니까 공평하다고 생각하십니까.
힘들어서 불공평하다고 여기십니까.
과연 공평은 좋은 걸까요.
아니 우리가 원하는 공평이 우리네 삶에 있는 것일까요.
무엇보다 아기 예수님께서 마구간에 오신 것은 공평한 일일까요.
카라바조의 ‘목자들의 경배’를 보며 생각이 많습니다.
예수님의 의보다 우리 사이의 공평을 더 바라본 해가 아니었는지.
너무나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음에도 여전히 주시라는 기도에 파묻혀 있는 것이 아닌지,
생사화복은 주님 손에 있다고 입으로는 고백하면서도
여전히 조그마한 화도 못 견디는 것은 아닌지....
목자들의 경배를 읽으며 나의 경배를 생각해보는 성탄時입니다.
(교계신문 연재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