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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영 Jun 07. 2017

참회하는 막달라 마리아

메멘토 모리

 



참회하는 막달라 마리아

캔버스 위에 유화, 133.4x102.2cm.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유월의 숲은 정중동입니다. 꽃의 기억은 벌써 희미해졌고 어린 순은 자랐습니다.

원숙해진 숲에서 푸나무들은 고요하게 하늘을 바라고 있습니다.

초록세상입니다.

멀리서보면 숲은 그저 초록이지만 숲에 들어서면 초록은 또 얼마나 가지가지인지,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은 세상이 나무 뒤였지요.

무성한 나뭇잎들은 그들의 가림 옷도 생각나게 합니다.  

생이 부끄럽고 슬퍼질 때 숲으로 가야할 이유이기도 합니다.  

나무는 가장 쉬운 언어로 부활의 증언!을  하고 있습니다.

눈부신 탄생과 성장을 지나 소멸하기 위해 참으로 아름다워지고 어느 순간 거침없이 조락합니다.

삶의 정점을 달리는 유월의 숲은 자신의 삶을 성찰하기에 아주 적합한곳입니다.

그리하여 성실하고 진지한 숲은 메멘토 모리!의 장소이기도 합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도서 1장 2절)솔로몬의 탄식에 기댄 바니타스 정물화는 17세기 초 네덜란드에서 꽃피운 양식입니다.

낡은 책이나 모래시계 악기와 조가비 해골 등을 통하여 삶이나 생명 속에 깃든,

아니 그들의 가장 근원적인 존재양식인 죽음, 소멸, 덧없음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교황 이노센트 9세는 죽음의 침상에 있는 자신을 그리게 했고,

알렉산드로스 7세는 자신의 침대 밑에 관을 보관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에게 언젠가, 아니면 지금 금방이라도 다가올 죽음을 벗으로 여길 수 있다면

참을 수 없는  고통도 견딜 만 하지 않을까요?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이라 할지라도 객관화 시킬 수 있지 않을까요?

미움은 옅어지고 증오는 조금 바랠 거예요.

그래서 삶이 좀 가벼워지지 않을까요?     


조르주 드 라투르, ‘참회하는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바로크 시대의 화가인  조르주 드 라투르는 촛불의 화가라고도 불립니다.

카라바조처럼 빛의 대비를 즐겨 그렸지만 카라바조의 빛이 그림 밖에 존재한다면 라투르는 그림 안에 빛을 놓았습니다.

안과 밖의 차이는 아주 큽니다.

라투르의 그림은 아주 정적입니다.

고요합니다.

적막하기조차 하죠.

단순한 구성과 어두운 배경으로 마리아에게 집중하게 하네요.

어디쯤의 그녀일까요?

일곱 마귀와 병에 시달리다 치유되었을 때의 그녀일까요,

죽었던 오라버니 나사로가 살아나는 은혜를 입은 그녀,

향료를 가지고 무덤을 찾아가 부활한 예수를 만났던 그녀일까요?

향유를 그리스도의 발에 붓고 머리카락으로 닦으며 죄를 회개한 여자일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그 모든 것들을 다 겪고 난후의 그녀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그녀는 여전히 젊고 아름다워 보이네요.

거울의 장식처럼 화려해보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촛불 대신 그녀, 저 장식이 화려한 거울에 날마다 자신의 모습을 비췄을 겝니다.

책상 위 그리고 방바닥에 내던져진 아름다운 보석들로 자신을 꾸미며 만족한 미소를 지었을 거예요.

누군들 그러지 않겠습니까.

촛불은 현재이면서 과거이고 미래이기도 합니다.

타올랐고 타오르며 지금 저리 눈부시지만 금방 사라질 거예요. 우리네 시간처럼요, 

거울 속에 촛불이 비치니. 마치 촛불이 두 개라도 되듯이.....

우리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지요.  

실체도 아닌 것을 실체인양, 거짓인데 진실인 것처럼 말이죠.

그런 촛불을 응시하는 마리아의 고요한 모습은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서이겠지요.

삶속에 죽음이 있다는 것을, 죽음은 우리네 삶의 귀결이라는 것을,

그리하여 삶과 죽음이  우리 안에 존재한다는 것을 아는 거지요.

해골을 쥔 손이 담대해 보이잖아요. 기도하는 손이잖아요.

겨우 이런 해골을 남기는 유한한 인생을 믿지 않습니다. 고백하는 손 같기도 합니다.  


꽃길만 걷게 해줄게~ 라는 노래도 있고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멋진 표현으로 회자되는 모양입니다.

집 앞에 있는 정발산을 아침마다 걷습니다.

아카시 나무가 많아서 꽃이 피어나 있을 때는 그 향기로 인하여 천상의 길이 되더군요.

어느 순간 서설처럼 꽃이 져 내리기 시작하니 정말 꽃길이 됩니다.

설마 이런 꽃길을 이야기 한 것은 아니겠지만 

우리에게 다가오는 알 수없는 삶의 비의거나 알레고리이거나 생의 아이러니처럼

참혹한, 그러나 실제 꽃길입니다.

아카시 져 내린 꽃길을 걸으며 바니타스를 사유합니다.

메멘토 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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