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위영 Oct 13. 2017

은유 隱喩






난 은유를 좋아해요.

은유는 뭔가 자유로움을 품고 있죠. 해석의 여지가 있는 , 

우겨도 괜찮은 여유랄까,  새로운 길이기도 하고 

아무도 가지 않는 길을 바라보는 일이기도 하죠.  

그러니까 보통 시에서 메타포 은유를 이야기 하지만 

사실 조금만 유의해서 듣는다면

모든 단어 속에 혹은 문장 가운데에 은유는  섬세한 모습으로 살아있어요..

너무 깊거나 너무 투명해서 잘 모르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긴 하지만요.

은유는 혹시 감추어진 비밀 같은 것 일수도 있어요,.

삶의 비의일수도 있구요. 

어쩌면 혹시 깊고 순전한 시간의 절창일수도  있을거에요. 

고요히 그만의 목소리로 부르는.....   



어제 속초에서 설악산 자생 수목원을 가서 조금 걸었어요. 설악누리길(?)이 있더군요. 

단풍들지 않는

푸르른 잎들이  아파서 혹은 바람에 밀려 가득 져내려 있는 길이었죠.

아직 푸르고 그래서 어두운 낙엽들이 쌓여있어선지 길은 스산해 보였어요. 

그늘이 짙어서이기도 했겠지요.     

숲은 우리 뿐이었어요. 두 부부ㅡ 

네 사람 중의 한 여성이 곁을 쉬 주지 않는 성격인데 

묘하게 나와는 잘 맞아서 가끔 부부가 함께 여행을 하곤 하죠.

명절 끝난 후라 한가해서 좋을 것 같다고...

방을 얻어 놨다고 오라고 해서

나두 시집살이 아닌 친정살이....로 명절 증후군이라도 다가오는 게 아닌가, 

생각할 즈음이라 좋다며 길을 나섰죠.

은퇴가 안겨준 작은 즐거움이기도 해요. 언제든 가볍게 떠날 수 있는,         

차안에서 바라본 높은 산들은 이미 단풍으로 붉게 물들어가고 있었지만

골짜기 아래 숲길은 아직 푸르렀어요.

한참 걷다보니 오래되었을 것 같은 묘지들이 나타났어요. 

아마도 오래 전 공동묘지였을 것 같더군요. 

이상하게 그 산길은 마사토가 가득해선지

무덤 위에 풀이 나질 않더군요. 

야트막한 산길에도 봉우리는 있더라구요. 

그 봉우리 위를 오르니 무덤 두 채가 나란히 있는데

무덤 앞에 비석이 커다란 게 두 개 그리고 자그마한 것 하나 세 개가 서있더군요.

무덤 양 편의 비석에는 그것을 비석이라 해야 하나....

하여간 아들이 부모에게 하고 싶었던 글을 가득 앞뒤로 써놓았더군요.

효자가 못되는 개자식...등등  

소설도 아닌 대화도 아닌 비석의 개자식은  낯설더군요. 

그 적나라한 글 내용도 그렇지만

자신의 불효를 운운하며 

오히려 자신이 효자라는 것을, 부모를 이리 생각한다는 것을 온 세상에 알리는 거죠. 

학벌이나 학문의 길이로 무지를 셈하는 것은 절대 아니라고 봐요. 

설령 그런 높낮이로 무지를 나타내는 사람이라면 

그 역시 또 다른 무지의 축에 서있는거구요,

하지만 은유가 없다는 것은  

굉장히 무지한 일이구나...생각이 들더군요.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까발리는

겨우 자신 속에 드리워져 있는  

부끄러움조차 삭히지 못하는 양태가 무지하다는 거죠.

그러다가 또 걸으면서 그런 문제를 그렇게 내식으로 단정해도 되는가....

회의가 가을바람처럼 일렁이기도 했어요.

아무것도 단언하거나 확신할 수 없는 지점이 

점점 늘어가는 게 늙는 일인가 싶기도 합니다.  


초원에서 

먼 초원만을 바라보며 살아온 사람들은 

우리와는 비교할 수도 없이먼데를 바라볼 수 있다고 하죠. 

길들여진 눈....이라고

단순히 생각할 수도 있지만

혹시 그 먼데를 바라보면서 

마음 아득해지고 그러면서 눈이 깊어지지 않았을까...  

가을 숲이 지기위해  저토록 아름다워 지듯 말지죠.

갑자기 유별나게 노란 은행나무 길이 나타났어요.  

노란색이뿜어져나와  사위를 물들이고 있더군요. 

봄날의 노랑과는 깊이가 다르죠.  

맑음에 처연을 고움에 슬픔을 적신 빛이라고나 할까,

이른 봄 생강나무 산수유개나리....자지러들듯한 그 노랑색들은 저를 밝히죠.

그러나 가을나무 가을 숲 가을 단풍은 저를 벗어나 사람에게로 스며들어요.

결국 색도 빛에 마음을 얹어 바라보는 것 아닌가,

마음이 느끼는 빛이 색 아닌가, 

봄숲이 은유가 엷다면

가을숲은 깊은 은유의 숲이죠.   

피아니스트 세이모어는 그의 뉴욕 소나타라는 다큐ㅡ

에단호크가 감독했는데 그도 솔직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곤해요  ㅡ

욕심이 많은 성격에 깊지도 못해서 

아무리 좋은 영화라도 두 번 보는 경우는 극히 드물죠.

그러나 번스타인 세이모어, 아흔살이 넘은 피아니스트 다큐는 세 번을 봤어요. 

음악이 있어서기도 했고

그가 하는 모든 언어가 제겐 깊은 은유를 지닌 어휘로 다가왔거든요.   

슈만의 환상곡을 치고 난 후...하늘을 만졌다는 표현을 해요. 

이 표현은 은유를 지나 

색다른 세계로의 진입을 위한 통로처럼 여겨지더군요. 

하늘을 만지는 음악,

당연히 저는 그 경지에 이를 수 없죠,.

그러나 그 말을 듣는 순간, 

하늘의 느낌과 슈만의 피아노곡 이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어요.  

그는 피아노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작은 소리라고 하더군요.

아 작은 소리가 중요한 피아노, 

아무런 힘도 없고 멋도 없어 보이는

그렇잖아요. 

<피아노는 작은 소리가 중요해>

이 단순한 문장이 주는 커다란 울림이라니,    

큰소리 보다, 그 어떤 것 보다 작은 소리가 중요한 피아노....

작은,  작은 것들로 이루어져 가는 삶의 갈래들....

삶의 결들...

이렇게 확장을 해가면 

매 순간이 고와지고 결국 중요해지죠. 

맞아요. 은유는 결국 그 깊이에서 삶의 흔적을 들어내는 거랍니다. 

결국 은유는 우리네 삶을 지극히 풍요롭게 만들고야 마는 존재가 되는 거죠.    

그는 한국전쟁에 왔었대요. 눈물을 흘리더군요. 수많은 죽음을 생각하며

 어느 날 땅콩인가...조금 먹을 것을 가지고 밖으로 나갔대요,.

 사슴이 다가오더니 그의 손에 든 땅콩으로 입을 들이 밀더래요,

 아 여기가 천국 아닌가, 

자신이 천국에 온 것 같았다고 그는 말하더군요.

은유와는 다른 결 위의 논리로 생각하면

전쟁의 상흔이 얼룩진 헐벗은 산야에서 얼마나 먹을것이 없었으면

얼마나 배가 고팠길래  사람의 손에 든 땅콩을 겁 없이 먹으려고 했을까,

그러니 그 절박함을 은유가 깃든 시선으로 바라본다면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눈물 흘리게 만드는 전쟁터에서 그가 만난 천국은

정말 천국이 되는 거예요.

아마도 그는 아름다운 곡을 연주할 때

가령 월광이나 달빛 같은 곡ㅡ 

베토벤이 월광을 시연할 때  남자다움을 대단한 것으로만 여겼던 

그 시절의 남자들이 울었다더군요ㅡ 

을 연주할 때 그 사슴을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그가 만난 천국이 그의 음막 곳곳에서 살아 움직이지 않았을까요?,      

 

은유가 가득한 가을 숲.

난 은유를 좋아한답니다.  



작가의 이전글 Atacama Crossing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