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위영 Mar 22. 2018

나는 책이다

올해 처음으로 열무김치를 담궜다. 

김치는 사실 가장 좋은 밑반찬이다.

오래 두고 먹어도 맛이 변하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풍성해지니,

그리고 나는 정말 김치를 좋아한다. 

맛잇는 김치보다 더 좋은 반찬은 없다. 

결혼한 뒤 규서 낳고  파주 시골에서 한 이 년 정도 살았다.

북한에서 트는 확성기 소리가 들려오는 곳이었다.

규서가 막 걷기 시작할 무렵 앞마당 귀퉁이에 난 토끼풀을 부며 모녀가 웃고 있는 사진...

지금의 규서 나이다. 

세상에 그 얼마나 젊었던가...

젊음의 맹목 중 하나가 젊음에 대해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비록 생각의 폭과 깊이는 작을지라도 그 대신 순수하고 맑다.

어린 딸을 보며 웃고 있던 그녀가 그립네, 그녀는 어디로 가버린걸까,   

생각해보니 나는 의외로 무한 긍정 타입이다. 

중학교 때부터 친한 내 절친의 말로는 울 엄마가 나를 너무 예뻐해서 그리 되었을 거라고

걔가 보기엔 다 큰 딸인 나를 울엄마가 그렇게 이뻐하더라는 것.... 

여튼, 

파주에서도 한참 들어간 그 시골이 고향이라도 되듯이 의연하게 살았다. 

일주일에 한번인가 오는 채소장수한테 가지가지 김치 종류...

그러니까 열무 얼갈이 배추는 기본이고 파김치 솔(부추)김치 고들빼기....등등

김치를 담궈 놓고 먹었다. 그래선지 우리 아이들은 지금도 파김치 부추김치 갓김치류를 즐겨 먹는다. 

김치종류가 많으면 생선 하나 굽고 된장국이나 찌개 하나 끓이면 누가 와도 밥상을 차려냈다. 

지금처럼 외식문화가 만연하지도 않고 

소박한 밥상이 익숙하던 시절이니

그러고 보니 멀지 않는 이웃 동네에 마누라가 도망 가버린 목사님이 있었는데 ㅋ~

그냥반을 일 년 넘게 아점을 해주었다.

종기형 후배가 와서 몇 달씩 묵기도 했었고

이 년 뒤 성수동에 와서 살 때 친하게 지내던 사람이 입덧을 해 자주 밥을 차려주었다. 

지금도 그친구 만나면 입덧과 내가 해주었던  밥 이야기를 한다.

성수동에서 팔 년 가까이 살았는데

그 때는 해물 매운탕이 유행이었다.

매운탕 한 냄비 끓이고 주위 사람들에게 밥상 엄청 자주 차려주었다. 

이런 배후에는 시장에서 가게를 하시던 시어머니 공이 크시다.

한 번씩 오실 때 마다 얼마나 많은 음식들을 가져다주시던지

나는 젊고 그래서 그런 음식이 정말 마뜩치 않았다.

아 이런 것이 생활에 정말 도움이 되는구나, 고마운 일이구나 철이 들 무렵

어머님이 가게를 그만 두셨다. 

김치 이야기를 하다가 멀리도 갔네. ㅎ

열무김치를 하려고 쪽파를 다듬는데 그게 그리 하기 싫었다. 나중에는 막 짜증이 났다.

사실 열무김치는 김치 중에 가장 쉽다.  

그런데도 마른 고추 물에 불려 갈아야지 마늘 양파 생강 풀죽 등등...

부엌일이란 게  참 도무지 간단함이 없다.

나물 하나만 하려고 해도 다듬어야지 씻어야지 데쳐야지 가지가지 양념 다 썰고 다져야지

거기에 부속된 그릇들....꺼내야지, 

하두 하기가 싫어서 원인을 생각해보았다. 

내가 워낙 이런 단순노동을 즐기지 않는가?

예전에는 즐겼는데? 그러면 늙어서인가? 

늙음의 제증상인 삶의 권태가 이렇게 음식 만드는 것으로 나타나는가.

보다 더 의미 있는 일에 나를 사용하고 싶은 건가? 의미있는 일이 뭐여? 

이제 가족에 대한 사랑....그 의무가 희미해져서?

김치 담기가 싫다하여 내가 가족들을  안사랑한다고? 네버,

가장 그럴싸한 담은 내가 나 좋아하는것만 하고 싶은 욕구가 강해졌다는 것이다. 

에너지가 작아지니 화도 자주 난다는 것이다.    

요즈음 난데없이 티비 시청 시간이 길어졌다.

관음증 환자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자연다큐가 펼쳐지면 여행이라도 간 듯이 홀려서 보고

한끼 줍쇼,.... 연예인 프로도 보면서 혼자 키득거리고...

깊은 밤 썰전이라는 토크를 보며 유시민 박형준의 생각을 듣다가 한 가지 사안에 저리 다른 생각이라니...

놀라다가 나도 은근 보수지....

저런 행동과 저런 표현은 저 사람이 어떠니까 그렇지....

혼자 하는  판단이 엄청 재미지기도 하다.

누워서 가만히 들여다보면 거기 천태만상이 펼쳐지고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성품이 보이니

무엇보다 티비가 엄청 편하다는 것, 에너지 사용 전무라는 것,

요즈음 책두 아주 천천히 읽는다. 

호퍼의 그림을 가지고 소설을 쓴... 물론 작가들이 엄청 많은 

<빛 혹은 그리자> 라는 책은 이번에 세 번째 빌린 책이다. 

반납하러 가서 또 빌리고 또 반납하러 가서 빌린...

그래도 아직 덜 읽었다. 

예전 같으면 이상문학상 같은 책은 그날 아니면 적어도 그 담날이면 끝내 버렸는데

한편 씩 읽고 또 놔두고

유시민이 추천한 호프자런의 랩걸이란 책은....지난 번 너무나 좋게 본 침묵의 책처럼

놀라운 표현들이 숨어 있는 식물 과학자의 스토리, 식물에 대한 이야기가

함께 쓰여 있는  이즈음 보기 드문 좋은 책인데도 천천히 아주 천천히 읽고 있다. 

데이비드 조지 해스컬의 나무의 노래와 숲에서 우주를 보다....는

내 취향에 딱 맞는 일엽지추인데 ...블레이크가 말한 것처럼 

한톨의 돌에서 세상을 보고 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보리라......

그래서 그도 아주 작은 숲속 땅 조그마한 곳을 만다라라 ...칭해놓고 

그냥 그곳을 바라보는, 관찰과 성찰을 겸비한 책인데...

이런 식물 책은 정말 순식간에 읽어 제꼈는데

요즈음 그것들도 아주 느리게 읽고 있다.

그렇다,  그러고보니 내가 확실히 느려졌다.

이제 육십이 넘었으니 할머니 대열에 들어섰으니 느려진 것이다.

그렇다고 그게 나쁜 것은 아니다.

내가 아무리 탐욕스럽게 책을 읽어낸다 하더라도

여전히 새 책은 무수하게 쏟아져 나와 여전히 나는 무지한자이며.......

그래도 괜찮다. 괜찮아,  

세상은 신이 인간에게 읽힐 요량으로 편집한 책이라는 알베르토 망구엘의 생각은 아주 마음에 든다.      

작가의 이전글 삼월에 떠나셨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