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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영 Jun 11. 2016

유월이강물처럼흐르는어느날

   입관예배

해저물녘. 

같이 차를 타고 가는 검은 옷의 여인은 탄식처럼 말한다. 

’나는 이 시간이 참 좋아’ 

대부분의 중년 여인들에게 하루 중 가장 좋을 때가 언제냐고 묻는다면 

열에 여덟 아홉은 해저물녘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낮도 아니고 그렇다고 밤도 아닌, 

낮의 자태를 신비로운 베일처럼 거느리고 밤의 기대감으로 풍부해 있는 시간, 

여유 있는 듯, 

포만한 듯, 

그러면서도 우수가 깃들어 있는 시간, 

개와 늑대의 시간이라기보다는 마치 중년의 시간이 아닌가, 

젊음을 회한처럼 뒤로 하고 노년의 지름길이 보이는 시점에서 

약간의 피로를 걸친 채 잠시 머뭇거리는 찰라, 

더군다나 우리는 누군가의 부음에 따라 그녀를 아니 그녀의 가족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이제 육십을 갓 넘긴 그녀는 지금 어디쯤 있을까?

유월의 저물어 가는 햇살은 장엄하다. 

벚나무 잎들 사이로 스며들어 녹음의 빛에 더 짙은 그늘을 드리우는 일몰. 

차들은 길게 늘어서 있고 

그 사이에서 어느 젊은 아이는 어깨를 다 들어낸 채 짧은 치마를 입고 걸어가고 있다. 

사람들의 시선이 햇살보다 더 뜨겁게 저 어깨와 다리에게 꽂히리라. 

햇살이 꽃을 피우게 하는 에너지를 숨기고 있듯이 

사람들의 시선 역시 저 희디흰 어깨에 강인한 젊음의 힘을 부여해주고 있는 것이다. 

맨살을 꽃피우게 하는 에너지. 

조그마한 아이는 엄마 손을 힘겹게 잡으며 신호등이 지기 전 

꽤나 넓은 길을 종종 걸음으로 달려간다. 

인생이란 저런 걸음걸이로 평생을 살아가는 건지도 몰라. 

언제 신호등의 초록빛이 바꿀지도 모른다는 초조감, 

능숙하게 걸어지지 않는 걸음걸이 

눈 부릅뜬 채 바라보고 있는 저 수많은 차들의 시선. 

아이는 뒤뚱거리며 불안한 걸음걸이로 아슬아슬하게 초록불이 다하기 전 건너편에 도착한다. 

그러나 거기가 길의 끝은 아니니. 

안녕, 아가야, 

지금처럼 그렇게 아주 열심히 걸으렴. 

그러나 엄마의 손을 놓고 너 혼자 걸을 때 명심해야 할 것은 

소를 몰고 밭갈이 하는 노련한 농부처럼 눈앞만 보지 말고 

먼데를 바라보면서 걸어야 하는 거란다. 

모여서 弔歌를 연습한다. 

같은 시대, 

비슷한 처지, 

그래서 알게 된 그녀를 위한 조가이다. 

검은 옷의 여인들 목소리가 다른 때보다 조심스럽다. 

항해의 끝에 부두가 보이고 거기가 우리가 가야할 길의 귀착점이라는 단순한 스토리의 가사. 

조가는 조용하다가 일순 격렬해진다. 

그리하여 인생길이 항해라는 소박한 비유가 빚어내는 은유가 놀라울 정도로 풍요롭다. 

죽음이라는 후광 탓이리라. 


아침.

입관 예배를 드리러 장례식장 가는 길. 

서울 길에도 농촌의 동네 길처럼 제법 접시꽃이 여기저기 두둥실 피어올라 있다. 

옥수수 잎에 빗방울이 내립니다/옥수수 잎을 때리는 빗방울 소리가 굵어집니다/ 

나는 당신의 손을 잡고 당신의 곁에 영원히 있습니다/

접시꽃 당신이란 아픈 아내 곁에서 아내를 지극히 사랑하는 시 구절이 자연스레 연상 되어 오고....... 

시는 여전히 그렇게 시인의 접시꽃 당신을 목메어하며 그리워하고 있지만 

그 시인은 아내가 떠난 뒤 일 년이 채 안 돼 재혼을 했다고 하니, 

시는 시일뿐 인생이 아니란 것을 시와 시인은 우리에게 선명하게 알려주고 있는 셈이다. 

관에 그녀를 담는, 

전혀 다른 세상으로의 이주를 기념하는 예배인데 어디에도 그녀 보이지 않는다. 

아무도 그것을 이상해 하지 않는다. 

그냥 무수한 흰 꽃들이 일단 이단 삼단으로 화려하게

마치 그녀의 죽음이 그렇게 화려하기라도 한 듯 높은데서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다. 

그녀를 기리기 위해 모인 자리이지만 

그녀의 남편은 핸드폰을 귀에서 떼지 못하고 

사람들은 서로 아는 척 하기 위해 눈인사로 바쁘다. 

아, 그녀의 딸래미가 분명한 젊은 여자 둘 지쳐 있구나. 

슬픔으로 진해 있는 그 모습에서야 그녀와의 별리가 생생해진다. 

죽음은 산사람과의 헤어짐이다. 


낮. 

여전하다. 

젊은 아이들은 짧은 치마를 자랑하고 아이들은 종종걸음을 치며 

접시꽃은 햇살의 저뭄에 따라 조금 입을 다물었을 뿐이다. 

내가 죽음에서 배우는 것은 언제나 그런 냉혹할 정도의 여전함이다. 

울 아부지 돌아가셨을 때도 초가을 햇살은 여전히 눈부시지 않았던가, 

탱자는 저 홀로 그 햇살에 익어가고 있지 않던가, 

아부지를 땅에 묻고 돌아와서 배부르게 저녁밥을 먹었고 단잠에 빠지지 않았던가.

언젠가 나 숨을 그치는 날, 

내 남편은 죽은 나 보다는 찾아오는 사람이나 핸드폰에 신경쓰지 않겠는가? 

그저 딸아이만 잠시 슬픔에 겨워 할 것이며 

그러나 그날 밤 그 아이도 피곤에 지친 몸으로 깊은 잠속으로 들어갈 것이다. 

징기스칸은 평생 전쟁으로 얼룩진 삶과는 

대조적일 정도로 평온한 죽음을 맞이했다고 한다. 

“죽음이 도대체 무엇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충분히 잡을 잤구나.” 

그의 마지막 말도 이러했다고 하나 

무덤의 흔적을 감추기 위하여 

수천 명의 기수들로 하여금 자신의 

무덤 위를 활보하게 한 치밀함과는 참으로 벼리 된 순간이기도 하다. 


유월이강물처럼흐르는어느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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