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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영 Jun 13. 2016

푸르른 유월의 아침

   내면의 침묵 소리

 



요즘에서야 설핏설핏 생각이 드는데

혹시 내 마음속엔 식물에 대한 센서가 하나쯤 더 있지 않을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이다지도 날마다 보는 저 촌스러운 넝쿨장미와 장미보다 더욱 촌스러운 쥐똥나무 때문에 이렇게나 마음 좋을 수 있겠는가 말이다.

물론 식물에 대한 센서가 있다 하여 특별한 지혜나 지식이 풍부하다는 이야기는 절대로 아니다.

그저 내안의 식물 센서는 저 쥐똥나무나 넝쿨장미처럼 흔하디흔한 것에

오히려 잘 반응하고 자족하는아날로그 적이면서 느긋한 센서라고나 할까.

그도 그렇다.

어찌 나만 홀로 특별한 센서가 있겠는가.

창조주 그분께서 공평하신 모습대로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센서를 허락하셨겠지.

다만 느린 걸음을 좋아하는,

목표를 잃고 해찰하기를 즐겨하는,

무엇보다 경쟁을 싫어하는 사람들에게만 발현되는 센서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기는 한다.

희부윰하게 주위가 밝아오기 시작하면 거실 버티칼을 스윽 올린다.

어제처럼 여전히 빛나는 바알간 빛으로 넝쿨장미 작은 송이들이 샐쭉 웃는다. 

내가 지 바라보듯 저도 나와 눈 맞춤 하면서 한수 더 떠 거실까지 처억 기웃거리며 들여다본다. 

거실 문을 열면 쥐똥나무 향기가 수욱 밀려들어오는데

음, 단순히 향기를 들어 마시는 게 아니라

아주 심하게 갈증 났을 때 맑은 물 들이키는 것처럼 깊은 숨을 들이쉰다.

그리고 얼른 복식호흡을 시작한다. 들이쉬고 내쉬고, 그렇지 그렇지,

내안, 저 깊은 어둠속까지 화장실에 소독약 뿌리듯 깊게 깊게 쥐똥나무 청아한 향기를 꾹꾹 밀어 넣는다.

태어나자마자 배우지도 가르쳐주지도 않은 배호흡을 잘하던 나는 어디로 사라졌을까,

혹시 복식 호흡을 잃어버리게 된 그 시점이

내가 아닌 남을 의식하게 된 시점이 아닐까.

나아닌 어떤 것들이 숨을 데가 필요해서 호흡조차 닿지 않는 저 깊은 속에 자리를 마련하면서

복식호흡 대신 쉽고 간편한 호흡으로 변환시켜 내 안을 들여다보지 못하게 만들어버린 것.

방충망 문을 열고 나무 계단 네 개를 내려간다.

옅은 아침햇살은 고요하면서도 공평하다.

더불어 낮보다 훨씬 너그럽다.

그래서 자그마한 단풍잎 사이로 슬며시 바라보아도 심하게 거부하지는 않는다.

향기의 대명사이던 장미는 현대를 살아가면서 체득했을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느끼는 것보다는 눈에 보이는 것에 약하다는 것을,

그래서 보이는 부분에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다보니 향기로 보낼 에너지가 소진되어 버린 지도,

슬프게도 요즈음 장미는 거의 향기가 없다.

쥐똥나무는 처음부터 사람의 시선을 끄는 식물이 아니었다.

산기슭이나 계곡 혹은 뒤꼍 사람의 눈에 잘 띄지 않은 곳에서 자라나기도 하지만

볼품없는 생김새에다 가지조차 단정치 못한 모습으로 많이 갈라지곤 한다.

이파리의 생김새는 얼마나 평범한지 몰개성의 극치이다.

그러나,

그래서,

사람의 눈에 띄지 않으니

사람들의 시선에 의해 주눅이 들리거나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할 필요도 없이 혼자서 꿋꿋한 자신만의 세계를 잘 지켜 왔을 것이다

깊은 내면의 응시.

그리하여 저렇게 사람의 넋을 홀리는 품격 높은 향기를 지니게 된 것이 아니겟는가?

마치 사람처럼ㅡ

가볍게, 가볍게, 타인의 시선 앞에서 언제든 변모되는,

그래서 자신을 잃어버린 나를 장미 속에서 바라보다가

쥐똥나무에서 솟아나는 깊은 내면의 침묵 소리를 듣는다. 


푸르른 유월의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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