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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영 Feb 26. 2019

먼지 頌

가령 친구가 동행이라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면 그대는 아마 가장 절친한 벗이 아닐까, 

그 고요한 성품과 은근한 태를 보면 그녀인 듯, 변함없이 꾸준한 인내를 지녔으니 듬직한 그이일 듯도 하다. 

지금도 여전히 그대는 마치 가족처럼 내 곁에 존재하고 있다. 

우습지만 나는 한때 청결을 내 인생의 아주 중요한 모토로 삼은 적도 있다. 

그대를 도륙하고 학살하기 위해 틈만 나면 걸레와 청소기를 들고 그대와의 싸움을 즐기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 너그러움이거나 혹은 나이가 주는 제증상인 귀찮음 때문에...

어느 때부턴지 그대와의 대결을 피하는 혹은 동거를 묵인하는 상태로 방향전환을 하고야 말았다. 

노회하기 그지없는 그대는 절묘한 때를 아는 지혜로움이 있다. 

내가 청결을 존중하며 거칠게 다가서면 살짝 물러났고 느슨한가 싶으면 겁도 없이 다가섰다. 

그대는 숨바꼭질의 권위자이기도 하다. 

내가 술래가 되는 동안 그대는 절묘한 자리에 살짝 걸터앉는다. 

문 뒤, 장롱 뒤 책상 뒤 싱크대 보이지 않는 귀퉁이들뿐 아니라 텔레비전 위, 오디오 위, 책상 위, 스피커 위, 

하다못해 거울 위에도 얼마나 사뿐히 내려앉는지. 

그대는 높은 곳ㅡ가령 스탠드 위 스탠드 속까지 아주 위험한곳에도 살며시 착지하는 놀라운 재주가 있다. 

그대의 날렵한 몸은 마치 공중곡예를 하는 것처럼 전기 선 위에도 가볍게 내려앉곤 한다. 

이제야 그대의 속성, 

평생 이기지 못할 게임이란 것을, 

설령 이긴다하여도 여전히 별 볼일 없다는 것을 이해했다고나 할까, 

그러고 보니 미묘한 색채를 지닌 그대를 먼지라는 단순한 단어로 폄훼해 버리기엔 뭔가 석연치 않다. 

온 세상의 고요와 적막을 가져다가 한 켜 한 켜 쌓은 것처럼 그대가 지닌 무한한 침묵은 어떤가. 

언제나 존재하면서도 언제나 침묵하는 물체가 그대 아니던가, 

얼마나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는지 그 하나 되는 품이 한참 때 사랑하는 연인들 엉키는 품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다.

달아오른 열 식기도 전에 등 돌리는 사람과는 차원을 달리해서 

시간이 흐를수록 그대들 사이는 도타와 진다. 수용력 또한 유별나 다가오는 모든 존재들을, 

아무리 상이한 것이라 해도 내치지 않고 따뜻하게 껴안아 그대化 시키기도 하지. 

그대가 없으면 눈이 있어도 볼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잊고 산다. 

즉 사물을 볼 수 있는 것은 빛이 투영체에 반사해 수많은 굴절을 통해 우리의 시야에 닿기 때문인데 

그런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공기 중 에 떠있는 그대들인 것을. 

그뿐이 아니라 그대들은 방사능이나 생화학 테러를 잡아주는 기민한 형사역할도 한다고 한다. 

겨울이 되면 얼음을 얼게 하는 눈 촉매의 역할도 하며 

그러니 세상에, 비나 눈이 오는 것도 그대라는 핵이 있을 때만 가능하다고 하니, 

생각해보라. 만약 그대가 없다면 비도 내리지 못하고 눈도 없으며 

불그스레한 빛으로 우리 가슴을 뛰게 만드는 황혼도 없다는 것 아닌가,

그대를 녹록하게 보지 않는다. 

우리의 삶속에 얼마나 섬세하고 우아하게 간섭하고 있는지.....를 이미 알고 있다. 

그렇다고 이렇게 심하게 창궐해서 우리를 두려움에 빠지게 하다니, 

매일 아침마다 미세먼지 앱을 확인하며 행동반경을 결정해야 하는, 

어쩌면 이제 마음대로 숨도 쉬지 못하는 미래를 고민해야 하는 무섭고 슬픈 현실에 우리는 직면했다. 

같은 종인 사람들 사이에도 공존과 소통 없는 무지한 행태를 일삼는 우리에게 대한 경고인가, 

자연을 다스리고 살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발전이라는 이름으로 혹은 탐욕으로 왜곡시킨 벌일 수도 있겠지. 

만물을 통하여 우리에게 메시지를 주시는 그분께서 그

대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놀라운 사인일수도 있겠다. 먼지만도 못한 너희들!!!!! 이라는...... 총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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