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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영 Jun 17. 2016

조영남 小考

회화의 최종 목적은 詩

 사소한 이야기긴 한데 서있는 위치에 따라 사물의 위치가 달라 보인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사랑하는 나무가 한그루 있다고 치자. 유심히 보면 날마다 그 나무 달라질 뿐 아니라 조금만 위치를 달리해도 생소한 모습의 나무가 된다. 보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에 思考가 더해질 때 그렇다는 말이다.  

思考는 보이는 것에 새로운 시각뿐 아니라 새로운 철학까지도 부여할 수 있다는 이야기. 아 나무 한그루 면 그게 그거지...라고 이야기하는 사람 앞에서 전혀 다른 나무가 눈에 보이는데도 그 나무를 이해 혹은 보여주기란 불가능하긴 하다.  어쩌면 예술은 바로 거기 그 지점에 근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보통 사람들에게 나무는 그저  나무이지만 예술을 하는 사람에게는 아주 다양한 나무의 변종이 보인다는 것, 그래서  자기만의 나무를 그리거나 쓰거나 표현한다는 것,  

<성찰>도 아주 깊게 <내재> 되어있다. 이 사실을 이해해서  자신의 삶에 적용한다면 고집이 대폭 줄어들 것이며 입에 거품을 물길이 별로 없을 것이다. 집게손가락을 앞으로 내밀 일도 없을 것이며 니도 옳다 니도 옳다 하고 말한 황희 정승 반열로 고공 상승할 수도 있다.

 더불어 이 사소한 이야기 속에는 의외로 현대 미술에 대한 이해와 수용 혹은 접근에 대한 태도가 농축되어 있기도 한다. 예술은 아름다울 것, 작가의 영혼이 들어가 있을 것, 자신만의 것일 것! 감동적이어야 할 것, 기타 등등 이제까지 예술이 우리에게 주었던 수많은 미덕으로 만들어진 단단한 인식 덩어리가 내재된 사람이라면, 그에게  현대미술은 요원할 수밖에 없다는 것,   그 나무가 그 나무지! 나무에 대한 다양한 접근방법이나 열린 마음을 왜곡된 시선이라 여기는 것처럼. 

현대미술은 우리가 알아왔던 그 모든 미덕을 벗어나는 곳에서부터 시작한다.   

이제까지 쌓아온 것에 대한 반기 아니 박살내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현대미술이다.  

마치 다가오는 미래가 새것인 것처럼 (정말 새로운 시간이 다가오는가?)

새로움에 대한 갈구! 그 현상 자체가 현대미술의 母港.       


조영남에 대하여 수많은 사람들의 횡설수설 전문가들의 왈가왈부 

호사가들의 설왕설래가 많다.

일단 큰 틀은 조영남의 문제를 <대작>의 문제인가 아니면 <조영남의 대작>에 관해서인가.

이 두 가지 큰 틀 중 어느 것이 합당한가....부터 길이 갈리기 시작한다. 

 전문가 그룹의 시선은 대작 쪽으로 약간 기울어 있고 일반인들은 <조영남의 대작>으로 조영남 개인에 대한 시선이 더 날카롭다.  평론가는 자신이 전공한 사조나 주의에 기인하여 판단을 하고 화가들은 자신의 작업 기준에 의하여 분별한다.  대중들이야. 아마  조영남의 노래부터  시작해서 열정 페이에 도달하면 톤이 높아질것이다.  

아니 럴수럴수 그럴 수가 그렇게 조영남이....

당연히 나는 전문가가 아니니 대중의 편에 서있고 조영남의 노래 제비를 기억하며... 아니 그 좋은 목소리를 지닌 사람이 어찌 그리 못된 짓을.... 도덕적으로도 참으로 고약한 일 아닌가!!!!

하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쯤서 

내가 잘하는 해찰 법대로 살짝 샛길을 걸어보자. 

사람에게는 근본적으로 ‘공정성’에 대한 감각이 존재한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나쁜 음식이나 오염된 것에 대한 거부반응이 혐오감으로 나타나는데 

혐오는 생존 반응의 결과로써 존재를 위한 당연한 결과물인데 

이 결과물 , 즉 혐오의 감정이  신기하게도 도덕적 위반을 할 때나 볼 때,

미각 혐오의 감정과 관련된 동일한 얼굴 근육이 반응한다는 것이다.  

무슨 말이냐면 연구 단계에 있지만 사람의 기본 적인 습속에서 

‘도덕’이라는 교과서에서도 사라져버리는 단어가 똬리 틀고 있다는 것이다. 

얼마나 아름답고 지적이며 행복한 일인가....    


재미있는 것은

임근준과 진중권 이동연이다.

 진중권은 이 두 사람의 실명을 써가며  야유했고

임근준과 이동연도 진중권을 거론하며 머라머라머라고 했다.


임근준은 꽤 많이 알려진 평론가다

우리나라 젊은 작가들과의 인터뷰에서 보면 그는 현대미술에 아주 정통한 평론가로 

나도 그의 강의를 유튜브로 몇 번 들었다.  

진중권이야 두말할 필요 없는 유명한 사람이고...

이동연도 예종 교수이다.

그런데 이 상위 전문가 그룹의 세 분께서 매우 상이한 주장을 펼치고 계신다.

더불어 이 명민한 분들의  언어 속에는 논리의 근거보다는 이상하게 자신들이 먼저 포옥 들어있다.

임근준은  대작이 사기라고 하고

진중권은 사기는 오버라고 한다. 할 일없는 정부가 하는 일이라며

개념미술과 팝아트는 콘셉트가 작품 자체라며 조영남이 그린 화투는 팝아트.... 의 제스처를 취했다고 했다. (제스처가 뭔가????)

임근준은 이렇게 말했다.  

대작이 현대미술의 방법 가운데 하나면, 한젬마 씨의 대필도 예술 활동인가? 

대충 아는 지식은 오판을 부른다. 무명작가 A 씨의 주장대로 그가 8년간 조영남 씨의 대작을 맡아 기존의 '조영남 스타일'로 그려내고, 조영남 씨는 그에 가필해 서명한 다음 유명세를 이용해 제 작품으로 팔았다면, 이는 윤리적 타락이고, 미적 사기 행각이다.     

예종 교수 이동연도 표절과 대작을 한 묶음으로 묶었다.

대작 이야기에 신경숙의 표절을 끌고 나오더니

한강의 멘 부 커 상이 신경숙 표절에 대한 한국문학의 성찰을 앗아가 버렸다는 이야기를 진중한 어조로 썼다.  

.‘표절’과 ‘대작’의 뻔뻔한 관행도 슬프지만, 더 슬픈 것은 그것을 마치 쿨하게 방관하고 해명하며, 애써 의미화하려는 비평적 행위이다. 그리고 더더욱 슬픈 것은 ‘표절’을 ‘수상’으로 지워 버리고, ‘대작’을 ‘관행’으로 지워 버리려는 대중과 문화 권력의 공모 의식이다.

상기 이동연의 문장은 명쾌하고 비유는 선명하며 결론은 예리하다. 

그런데도 나는 그게 심히 궁금하다.

표절과 대작이 같은 선상에 놓아도 되는 <물건>인지......   


진중권.

팝아트면 팝 아트지 팝아트 제스처는 뭐란 말인가. 

이를테면 그 이야기는 조영남의 화투 그림이 팝아트인지 아니면 그 흉내 인지도 정확히 판단하지 못하면서 지금 오버니 개념미술이니 현대미술이 이를 논한다는 말도 되는 건가,  팝아트 작가들은 대작 혹은 대행 자체가 작품의 콘셉트 속에 들어가 있는데 조영남은 그것은 아닐 듯.... 이런 미적지근한 이론 속을 오리무중 떠돌다가  사법!!! 에만 이르면  오버라니... 그게 비전문가들 즉 나같은 사람의  무지한 감성적 접근과 뭐 그리 다르겠는가....


임근준도 그렇다. 

대작 논증 속에  한젬마의 대필은 왜? 나타나는 걸까? (일석이조? 그런데 그녀 책  세상에 정말 유령 작가가 써준 글인가? 그림 읽어주는 여자가 아니라 빌딩 산 여자라는 타이틀의 기사는 읽었지만) 대필과 대작의 차이는 너무나 선명하다. 지나친 선명함은 유치함을 야기하기도 한다.

무슨 말이냐면  대필은 현대미술이 아니라 절대 불가능하고 대작은 현대미술이라 가능한 일 아닌가.

이 난센스적인 비유는 임근준의 한젬마에 대한 비호감을 선명하게 나타낼 뿐  

대작에 대한 설명으로는 아주 비 논리적으로 보인다. 대충 아는 지식은 오판을 부른다.... 는 아주 명료한 발언이지만  조영남의 대작 논거로는 지나치게 구멍이 숭숭 뚫려 있는 비약이다.      


내가 보기엔 현대미술의 한 축을 지탱할 수 있는 단어는

모든 작품들이 다 개별적이라는 것.

한퀘에 꿰어지는 사조가 아니라는 것 정도이다.

어디에도 공통분모가 없다는 의미로 풀이해도 된다. 

전혀 이질적인 작가들의 작품을 보며 현대미술을 논하려는 것, 이것은 매우 불가해한 일이다. 

예컨대 내가 팝아트에 관해서 조금  안다고 치자. 

리히텐 슈타인의 매끈한 그림들. 레디메이드 작품들 비인격적(이런 점도 유심히 볼 것!)으로 보이길 원하는 작품들에 대하여 조금 눈이 떠졌다고 해서 그 떠진 눈으로 앤디 워홀의 작품을 이해할 수는  없다는 이야기, 

전혀 다른 관점에서 새로운 시작을 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사조 이야기를 했지만 사조만이 아니라 

우리네 인생 이야기.... 

그 존재와 그 관계, 그.. 그  그에 대한 모든 이야기가 매우 매우 개별적인 사안이라는 것!

그러니 다시 말해보자면 주의나 사조, 

무엇인가를  뭉뜽거려진 집단에 대한 해석을 한다는 것은 

결국 사조나 주의 이상의 거친 일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거기에서 어떤 섬세함을 기대하기란 정말 낙타가 바늘구멍 뚫는 일과 흡사할지도 모른다.   

  

당연히 나는 조영남을 조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 너무 쪼잔했으니 사람을 쪼잔하게 대한 값을 치러야 한다고 생각한다.  솔직히 나도 그의 갑질, 열정 페이..... 에 가장 화가 난다. 너그러울만한 위치와 자산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그렇지 못함에 분노한다. 텔레비전에서 보이던 자유롭고 그럴듯해 보이던 생김새와는 상관없이 매력 있어 보이던 그 멋진 아저씨 어디간겨????   

 조금 약간, 솔직해보자면 하도 현대미술에 관해서 이것저것 들어 주은 게 많아선지 대작에는 그냥 그럴 수도 있지... 그리고 사실 평생 그림을 좋아하고 그려왔으니까.... 자못 부드러운 마음이 생기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행한 초 갑질 열정 페이에 다다르면  대작이 갑자기 아주 못된 일로 여겨지기도 한다. 


볍원은 <대작>만 문제로 볼까> 

<조영남의 대작>을 초점으로 할까, 

아마도 그 역시 판사의 성향에 의해 혹은 그의 속에 자리한 예술에 대한 이해도

그리고 무엇보다 현대미술에 대한 소양에 의해 좌우될 것이다. 

기자들은 판사의 성향에 대해 알아내고 꼬치꼬치 파내서 단신으로 적을 것이고 

나 같은 사람은 그 몇 마디 문장 속에 가려진

새로운 <대작> 혹은 <조영남의 대작>을 찾아 읽노라 하마 매우 즐거울 것이다.       


아 오늘 무슨 글에선가...

<회화의 최종 목적이 詩>라는 문장에 줄을 쳤다. 무릎을  탁 치듯이...   .


**파란 글씨는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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