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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영 Aug 22. 2019

무궁화호 연서

     

  가끔 무궁화호를 탄다. 차비가 쌀뿐더러 기차를 길게 타게 되니 저절로 여유로워진다.   두세 시간이면 갈 거리를 다섯 시간을 간다. 기차를 타는 순간부터 느긋하고 여유 있어지지 않겠는가, 

 어느 핸가 우리 동네에는 눈이 오지 않았다. 눈 내리는 풍경이 보고 싶어서 날마다 눈 예보를 기다리다가 결국 일기예보를 보고 눈이 내린다는 태백으로 떠났다. 기차 안은 훈훈하고 넓은 창으로 수많은 풍경들이 쉴 새 없이 지나갔다. 풍경의 품위는 영혼의 품위와 같은 선상에 있다고 어느 학자는 적었다. 나는 그 말에 공감한다. 새롭고 거대한 풍경만이 여행은 아니다. 너무나 일상적인 풍경이 지나가도 그 풍경이 내 마음을 건드린다면 멀고 아득한 여행이 될 것이다.  풍경 속에서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듣는다. 준비해간 커피를 한 모금 마신다. 이런 아름다운 카페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 가방에 든 책을 펼쳐서 읽는다. 새기고 싶은 구절이 있으면 창밖에 눈을 주며 사유한다. 풍경은 사유를 도와주는 매염제이다. 자연이 주는 아름다움 속에서 삶이 지닌 비의를 생각한다. 기쁨은 짧고 고통은 길며 즐거움은 찰라나 괴로움의 그림자는 길고 어둡다. 자연은 지금 저리 고요하나 그가 화를 내면 우리는 감당할 수 없다. 공평과 모순은 어쩌면 우리 삶의 들숨날숨일 수 있다. 공평을 우리는 좋아하지만 그 속에 숨은 모순은 우리를 절망에 빠트린다. 모순을 비웃지만 그 모순이 공의일수도 있다.  

풍경은 우리의 생각을 간략하게 정리해주기도 한다. 눈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바람에 나풀나풀, 하늘에서  내리는 은총이다. 플라톤이 궁구하던 이데아의 변형이다. 나는 그리 생각했다.  더 이상 무얼 바라랴,

 그 때부터 나는 무궁화호가 좋아졌다. 아마 잘은 몰라도 무궁화호는 모든 기차 중에서 가장 낡고 낮은 급의 기차일 것이다. 예전에 경부선 열차는 좋고 호남선 열차는 낡고 오래된 것들은 사용한다는 소문이 무성했다. 지금은 좀 달라졌을까?같은 무궁화호 열차지만 좀 새것이고 상태가 좋다면그리고 그것을 선택할 수 있는 위치에 내가 있다면 나라도 내 고향 가는 길에 좋은 차를 배치하겠다.지성과 섬세함,그리고공평함이한 쾌에 꿰지듯 선진국은섬세한 매뉴얼을 지향할 수밖에 없다.그래야 공평해진다.

 가끔 가다 기차에서 방송이 나온다. 지나가는  ktx를 먼저 보내기 때문에 멈춘다고 한다. 왜 우리 기차가 기다려야하지, 그런 생각은 하지 않는다. 당연히 속도를 위해 태어난 차는 빨리 가야한다. 속도 대신 풍경을 더  많이 품고 있는 기차 안에서 나는 더욱 느긋해진다. 

 지금 내가 타고 있는 무궁화호는 용산에서 여수로 가는 기차다. 키가 자랄 만큼 자란 저 벼나무들을 찬찬히 응시할 수 있다. 응시는 사랑의 시작이다. 응시라는 그 찬찬한 시간 없이 사랑은 없다. 올벼는 벌써 머리를 살짝 내밀었다. 저 짙푸른 녹빛은 금세 변할 것이다. 변함 속에 자람과 소멸이 함께 존재한다는 것은 아이러니 같지만 대다수 생명들의 진행로이다. 변함은 사라짐과 동일한 언어라는 생각이 들면서 늙음과 죽음도 편안하게 맞이하리 다짐해보기도 한다.   

 무궁화호가 다정한 이유는 자주 멈춰 선다는 것이다. 많은 역에 멈춰서며 안부를 전한다는 것이다. 안내 방송이 나오고 몇몇 사람이 내리기 위해 내 곁을 지나간다.에스컬레이터가 있는 역도 있지만 그런 것들이 전혀 필요치 않는 곳에 편안하게 자리하고 있는 역들이 대다수다. 넓은 평야가 보이는 땅에 조그맣게 자리하고 있는 작은 驛舍들은 저절로 歷史를 떠올리게 한다. 어떤 거대한 것, 새로운 것들이 지니지 못한 품격의 세월을 연상하게 한다. 지나치면서 사라져간 수많은 사람들의 발걸음을 기억하게 한다. 그러니 무궁화호는 내 시간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게 없었던 시간을 채워주는 것이 아닌가, 그저 흘러가버리고 말 시간을 저 느린 풍경으로 사냥해서 오히려 내 안에 채우는 게 아닌가, 낯선 역사의 저 건물은 얼마나 많은 사람을 보내고 맞이했을까. 역사곁 은행나무는 팔월의 열매를 가득 매달고 있구나. 오랜 시간을 은행나무와 함께 살아왔을 저 아련한 배롱나무를 빨리 달리는 기차에 탔더라면 어찌 눈 맞춤 할 수 있었으리. 

 배롱나무는 남쪽나라의 나무다. 세월이 하수상해서 강원도에서 사과가 크고 대나무와 배롱나무도 중부지방을 훌쩍 넘어섰지만 뜨거운 여름날 배롱나무의 정취는 오직 남도의 것이다. 

백일홍 꽃은 논 자락 옆에 서있다. 어서 자라렴, 어서 익으렴, 벼의 엉덩이를 토닥이며 격려하듯이 그렇게 벼를 굽어보고 있다. 신작로 곁에 서서 지나가는 차를 바라보기도 하나 실제 배롱나무의 관심은 오직 벼에 있다. 벼가 패고 익기 까지 짙은 초록의 벼가 누우런 빛으로 변할 때 까지 배롱나무 꽃은 절정을 향해 치닫는다. 위로 자라기보다는 나지막하게 옆으로 커져가는 다정한 나무, 막바지 더위 속에서 더욱 아름다운 꽃,   

 기실 내게 순천 가는 이 무궁화 열차의 길은 슬픔의 길이다. 어딘가 다른 세상을 헤매고 있는 아픈 언니를 찾아가는 길이다. 언니 언니 아무리 불러 봐도 대답이 없다. 가끔 다리만 조금 움직일 뿐 몸을 움직이지도 못한다. 겨우 고개를 조금 움직이고 눈을 뜨는데 그 눈은 정말 슬픔을 담은 눈빛이다. 무엇인가를 아주 깊게 생각하는 눈이다. 나를 바라볼 때는 나를 정말로 응시하는 것 같다. 너무 괴로워 말아, 영아, 모든 사람이 가는 길이야, 말하는 것 처럼도 여겨진다. 뇌의 어떤 기능이 정지된 것이라면 저런 눈빛을 지닐 수가 없을 것이다. 어쩌면 언니는 우리가 입으로만 말하는 어떤 근원적인 존재의 상태에 머물고 있는 것일까, 

 마치 가슴속에 불덩이가 떨어져서 화상을 입은 것처럼 언니 생각만 하면 아리고 쓰리다. 내가 할 일이라곤 기도밖에 없다. 아니 기도가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가, 주님, 선하신 주님, 주님의 선하신 뜻을 믿습니다. 생사화복을 주관하신 그분께 나의 고통을 괴로움을 슬픔을  기도에 담아 그분께 슬며시, 자주 밀어버린다. 

 저 창으로 스쳐지나가는 풍경들은 내게 우정처럼 스미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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