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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영 Nov 13. 2019

제주 애월 해안가

선인장 자생 군락지

 애월 해안도로를 달리다가 두세 번 멈췄다.

수많은  크고 작은 저만의 형체를 지닌 괴이한 돌들이 무리 지어 손짓을 했기 때문이다. 

사실 가까이 가보면 검은 돌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물이 묻지 않은 돌들은 회색이었고 환한 햇살을 받으면 더 환했다. 

그러니 돌이 빚어내는 채색 없는 음영들의 수묵화라고나 해야 할까, 

하지만 저 강렬한 힘을 저 완강한 자태를 어디 캔버스로 밀어 놓으랴, 

수많은 세월이 함께 만들어낸, 세월 만이랴, 바람이 나서겠지, 푸르른  저 바닷물도 가만있을까,

햇살은 어떻고....

그러니 내 앞의 풍경은 단순한 풍경이 아니다.

풍경은 홀로 풍경이 되지 않는다. 풍경은 조화로움이고 순리이자 정연한 논리이다. 

풍경은 무엇보다 바라보는 자와의 소통이다. 

그러니 풍경은 일종의 길이다. 

세상에 얼마나 많은 길이 있는가, 

그 수많은 길들 중의 하나를 오늘 새롭게 품에 담는다. 

우리가 밟는 길은 또 얼마나 작으며 협착한가, 

겨우 몇 발자국 스치고 스미듯 돌 위에 풍경의 일부가 된 내 발자국은 순간에 사라져 간다.  

그래서 장엄한 일이 될 수 있다. 

생은 사라짐이라는 예표를 풍경은 나에게 알려주고 있다.  

나는 높은 돌 위에 가서 손을 번쩍 들었다. 

항복의 표시였다. 

풍경 뒤에 사라짐 뒤에 계시는 그분에게 드리는 나만의 표시.  


  

바닷가 윤슬은 한도 없이 이어졌다. 

순식간에 나타났다 사라지지만 지치지도 않고 다시 소생되는 빛과 물의 조화로움 

그 눈부심은 매혹의 향연이었다.   

애월 해안도로를 지나 월령리에 들어선다. 

애월의 월과 월령리의 월은 둘 다 달 月자다. 

이 월자는 달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땅(land)을 뜻하는 말로 달 tar을 빌려 쓴 한자라고 이해한 사람이 있다. 

약간 높은 땅을 달/tar이라고 그래서 달동네...

월령리는 달처럼 둥글게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     

월령리 자생 선인장 군락지는 천연기념물이다. 

저 혼자 거기서 나서 자라고 죽고 다시 그 후손들이 나서 자라서 죽고

자연이 키운 혹은 스스로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자신만만한 자생종. 

척박한 돌 틈에서 생명을 이어가는 것은 태생이 사막이기 때문이 가능한 일이다.   멕시코가 고향인 선인장은 쿠로시오의 난류를 타고 와 제주 월령리에 터를 잡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생각해볼수록 대견하다.  

얼마나 먼 여행을 했고 또 얼마나 숱한 질고를 거쳤을 것이며 겪어 낸 인내는 또 얼마나 많을 것이며 눈물겨운 것인가,  

가시처럼 보이는 것이 선인장의 잎이고 손바닥만 한 몸은 줄기다.

먹을 것 없는 사막에서 살다 보니 먹이의 대상이 될 것 같으니 

저리 가시로 이파리를 삼았을 것이다. 

자세히 보니 새것은 푸르고 여리고 새침하다. . 

오래 산 것은 늙은 사람처럼 흐무러져 있다. 

그래도 열매는 새것에 달리지 않는다고 한다. 

새것은 저 살기도 바쁘겠지.

 오래 산 것 역시 저 살기도 바쁘지만 어미기 때문에 

열매에게 곁을 줄 것이다. 

해가 길게 저물어가기 시작했다. 

느리게 걷기에 딱 좋은 곳, 

파도도 느리게 걸어오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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