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킨케이드 Thomas Kinkade
십이월에 들어서니 문득 사는 것, 꿈결 같은 일 아닌가,
삽시간에 다가오고 스르륵 사라지는 세월의 모습이 유별나게 선연해서 말이지요.
사람들의 말소리는 한 옥타브 정도 올라가고 아이들은 여기저기 무리 져 돌아다닙니다.
거침없이 떠다니던 바람이 어느 순간 나풀거리는 눈이라도 품게 되면 저절로 가슴이 뛰는 것을요.
그러나 없는 것처럼 부유하고 있다가 삽시간에 쳐들어오는 적막함도 있습니다.
그때가 그림 읽기엔 그만인 시간들이지요.
일반적으로 예술가들은 가벼움을 경멸하고 깊이에 대해 천착하지요.
깊이는 소수이고 가벼움은 다수인데도 소수만이 볼 수 있는 깊이에 목을 맵니다.
오죽하면 파트린드 쥐스킨트는 ‘깊이에의 강요’라는 글에서 진짜 목을 맨 이야기를 적었겠습니까.
실력 있는 화가의 작품에 대해 “다 좋은데 깊이가 좀 없는 것 같아” 평론가의 말에 화가는 결국 자살에 이르게 되고 자살한 그녀의 작품에 대하여 또 다른 깊이를 운운하는..... 다양하게 변주되는 소설이지만, 조금 방향을 바꿔보면 예술가뿐 아니라 우리네 삶에서도 적용됩니다. 누군가 내 삶에 깊이가 없다고 한다면, 아마 순식간에 증오가 분수처럼 솟구쳐 오르며 얼굴이 벌게질 거예요. 설령 삶의 깊이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 않고 사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말이죠. 그렇다면 깊이는 영혼처럼, 생래적인 존재일까요? 그럴 것 같기도 합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모든 삶이 혹은 모든 예술이 <깊음> 속에만 존재한다면 삶은 지루해지고 명람함은 그 깊이 속에 숨어버릴 거예요. 가볍고 밝은, 고급함으로 치장되지 않는 순전함이나 솔직함도 필요하다는 이야기죠. 굳이 컨템퍼러리 아트나 팝아트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겨울이 되면 꼭 듣게 되는 브람스의 알토 랩소디만 마음을 움직이는 게 아니라 봄기운 설핏 산자락에 비칠 때면 연분홍치마가 봄바람에(이 노래 가사가 시인협회서 상 받은 거로 기억해요). 가 저절로 흥얼거려지기도 한다는 거지요. 정서를 움직이는 힘은 유행가나 클래식이나 비슷하다고 할 수도 있어요. 오늘의 작가 토마스 킨케이드의 작품을 내식으로 표현해본다면 좋아하는 노래 햇빛촌이 부른 ‘유리창엔 비’ 라고나 할까요,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물씬 나는 그림들입니다. 깊이 생각할 필요도 없는 그저 마구 다가오는 그림입니다. 아마 작가도 그다지 깊은 생각을 하며 그림을 그렸을 것 같지는 않아요. 아름답고 따뜻한 크리스마스면 되지 뭘 더 바래, 하며 그렸을 것 같습니다. 집 주변으로는 숲이 가득해 잎진 낙엽송도 있을 것이고 그보다 늘 푸른 나무들이 그득한 곳입니다. 숲에는 하염없이 고요하게 눈이 내리고 집 앞에도 흰 눈이 가득 쌓여있습니다. 창문마다 크리스마스 장식과 촛불이 어여쁘게 자리를 잡고 온 집의 등은 환하게 켜져서 지나가는 사람들의 마음조차 따뜻하게 해 줄 그런 집입니다. 털모자와 털장갑을 낀 아이 하나가 부모의 손을 잡고 팔짝 거리며 돌 위 계단을 걸어가며 할머니 할아버지를 부르는 장면이 저절로 연상됩니다. 저 따뜻한 집 문을 열고 반갑게 손녀딸을 맞아들이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보이는 듯도 합니다. 바로 옆의 그림 역시 킨케이드가 그린 새벽송 풍경입니다. 어렸을 때 새벽송 하는 분들을 위해 엄마는 따뜻한 죽이나 식혜를 준비하셨는데 작은 잔치 같은 분위기 때문에 안 자려고 눈을 부릅뜨고 있다가 아스라한 꿈속에서 기쁘다 구주 오셨네~가 들려오곤 했어요. 그 아름다운 풍경이 사라져 버리고 이제는 그림이나 기억 속에서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문득 새벽송이 빠져나간 헐거워진 틈새로 세상의 것들이 물밀 듯 밀려들어오지 않았을까.... 자세히 보면 그림 속 굴뚝들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습니다. 얼마나 따뜻해 보이는지.... 굴뚝 연기는 그리 따듯해 보이기도 하지만 사람이 살고 있다는 표식이기도 하죠. 오늘 아침 우리 동네는 영하 13을 찍었어요. 차를 운전하는데 제가 숨을 쉴 때마다 김이 나오는 거예요. 굴뚝의 연기처럼 살아 있는 표식이기도 하지만 그만큼은 따뜻해야 되지 않겠니.... 토마스 킨케이드는 가난해서 집을 내놓아야만 하는 입장에 처했을 때 집을 구할 돈을 구하기 위해 그림을 팔러 다니지만 팔지는 못하고 대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그림을 그리라’는 글랜의 충고를 받아서 가장 아름다운 집을 그려 어머니에게 드리게 되죠. 결국 미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빛의 화가, 크리스마스 화가가 되었죠. 미국 가정에 그의 작품이 적어도 천만 개는 있을 거라는 이야기도 있어요. 그의 작품에 대해 클래식한 평론가들은 난리를 해댔죠. 그는 의연하게 대답했어요. <문화와 상관이 없을지 몰라도 내 예술은 천만의 사람들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의의가 있다. 나는 실제 사람들과 관련이 있다. 세상에 추함만 있는 것이 아니란 것을 사람들에게 일깨워 준다. 나는 수많은 사람에게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예술을 가져다준다> 킨케이드는 아내를 지극히 사랑해서 그의 작품 속에 내 니트(NANETTE)의 이니셜인 ‘N’을 넣곤 했습니다. 물론 이 두 작품에도 있습니다. ‘당신의 삶을 빛나는 명작으로 만드는 7일간의 동행’이란 그가 그리고 쓴 아주 어여쁜 책이 있는데 <나는 최선을 다해 그림을 그리면서 하나님과 하나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는 고백을 만나게 됩니다.
12월은 이미 성탄時니 독자 여러분 메리 크리스마스! <교계신문 연재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