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에서도 자연스레 팔짱을 끼게 되는 차가운 겨울이다. 가끔 팔짱을 낀 채 창 쪽으로 다가서면 잎 떨군 가로수 나무를 바라보게 된다. ‘흠 없는 혼’이라는 시적 표현이 아니더라도 겨울나무들은 가식 없는 원형의 존재다. 오히려 그 어느 계절보다 당당한 모습이 굳이 이름을 불러가며 구별할 필요 없다는 듯 그저 나무만으로 족하다.
장욱진의 나무 역시 이름이 필요 없다. 나무라고 하기에는 너무 가볍고 또 너무 크다. 집을 품고 있는 나무이며 산보다 더 큰 나무이며 무엇보다 그의 나무는 땅에 심어져 있지 않다. 공간에서 호흡하는 나무라고나 할까, 그래선지 금방이라도 날개 짓을 하며 솟아오를 것 같기도 하다. 어느 나무는 누워있기도 하고 길게 기울어져 마치 세상을 품에 안고 잠든 것처럼도 보인다. 거대한 숲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실제 그의 나무에는 사람이 살기도 한다. 새가 깃들여 노래하고 강아지의 쉼터가 되는 나무. 어느 나무는 하도 거대해 숲과 산을 지나 세상에, 나무 안에 달과 해가 깃들기도 한다.
그는 나무를 아주 간결한 선과 색채만으로 그려낸다. 생명이면 됐지 무슨 수사가 필요하니. 수사 많은 나를, 그리하여 수사만큼 부족한 존재라는 깨우침을 준다.
붓질 한 번에 솟아나는 나무도 있었는데 그 한 번에 바람까지 담고 있으니 참으로 그의 나무 신묘하지 않는가. 일필에 의해 창조된 그의 나무는 세상의 모든 숲을 대신해도 될 만큼 충분히 차고 넘친다. 새는 거기 깃들이고 개는 앞발을 들고 짓는다. 그의 해는 어찌 그리도 사랑스러운지... 빨갛고 작고 푸르고 둥글고 흐릿하고 하도 부드럽고 사랑스러워 세상을 먹여 살리는 생명의 근원이라는 무시무시한 생각을 하지 않게 한다.
그러니까 그의 그림은 겨우 해와 새 나무 개 사람이 전부다. 사이즈도 아주 작은데 세상에 그 작은 세상 속에 실제 세상이 가득하더라. 그것도 축약된 혹은 압축된 세상이 아니라 그 어느 세상보다 확장된, 우주라는 혹은 지구라는 공간만이 아닌 그 위에 삶의 더께가 그득하게 얹어진 세상,
그는 가끔 나무를 어느 공간 속으로 밀어 넣기도 한다. 산 위에 있는 산보다 더 거대한 공간. 그러니 그의 나무 한그루는 저 먼 붉은 태양과 함께 우주적 존재가 된다. 너무 거대해서 지구가 움직이는 것을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그는 작은 새와 강아지를 풀어놓아 놀라울 정도의 생명력을 나무에게 부여해준다.
그의 나무는 불처럼 타오르다가ㅡ실제 동해凍害를 입은 감나무에 새순이 돋을 때 그는 마치 나무가 불타오르는 것처럼 여겼다고 한다ㅡ 어느 때는 나무를 돌로 그려 시간의 그릇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그의 그림 속에서 나무는 마치 호수처럼 보이기도 한다. 나무가 되는 새도 있다. 새는 강아지처럼 강아지는 병아리처럼 보일 때도 있다. 어른은 아이처럼 보이고...
아이는 동물의 새끼처럼 보이기도 한다. 닭은 우주처럼 거대해서 아이를 태우고 어디론가 금방이라도 박차오를 비행기처럼 보이고 개는 수탉의 아래 숨어있다. 나무는 닭을 피해 살 짝 몸을 돌리고 아마도 낮에 나온 반달은 수탉의 하나 빠진 깃털처럼 보이기도 한다. (닭과 아이 )
그가 즐겨 그린 사람. 새 강아지 그리고 나무와 하늘... 집.... 집이 되는 사람과 산은 사람처럼 그런 그들을 바라본다. 그 모든 존재들은 마치 공기처럼 바람처럼 서로를 넘나 든다.
그의 그림이 해학적이라고? 아니 그의 그림은 그저 저절로 미소 짓게 했다. 내가 보기에 그는 나무를.... 너무 사랑하여 감히 나무로 해학을, 풍자를 하지 않았다. 마치 그가 창조한 나무에서 피톤치드가 솟아 나와 내 호흡 속으로 스며들 듯 자연스러운 미소. 자연스러운 공감 그리고 자연스러운 기쁨이 있었다.
그의 작품은 그가 창조해낸 간결한 나무처럼 우리네 삶을 가볍게 하는 높은 산소량을 발사했다. 몸이 가벼워지고 시간은 경쾌해졌다. 타자의 시선으로 내 삶을 들여다보게 하는 삶의 객관화라고나 할까, 그 미답의 시간이 그의 그림 속에서 흘러나와 나를 충분하게 적셨다.
그는 나무를 너무 사랑하여 그에게만 들리는 나무의 오라토리오를 표현해낸 것이다. 그림으로 나무라는 악보를 적은 것이다. 그의 작품 치고는 조금 커다란 그림. 동물가족은 화실 벽에 그가 그렸던 작품..... 즉 벽을 그대로 떼 내온 그림ㅡ 근데 그 그림 위에 소의 코뚜레와 워낭이 함께 걸려 있었다. 뒤샹의 샘보다 훨씬 더 자연스럽게...‘나무보다 아름다운 시를 내 다시 보지 못하리/ 오직 나무는 하나님만이 만들 수 있다네/’ 장욱진의 나무 앞에서 나무를 예찬하는 죠이스 킬머의 시가 떠오르다가 쇠약해지는 경험을 했다.
양주에 있는 장욱진 미술관, 차에서 내리니 다가오는 영롱한 겨울 기운들.. 공기의 차가움과 벗은 나뭇가지들이 뿜어내는 명료함으로 만들어진 서늘한 세계였는데 그래선지 다른 공간으로 이동을 한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산자락 아래의 하얀 건물ㅡ호랑이를 연상시키는 건물이라고 설명을 하더라만ㅡ은 멀리서 보니 성장한 여인이 손짓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는데 미술관을 나올 때는 장욱진의 나무ㅡ그의 그림 속 자유로운 한그루 나무처럼 여기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