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 Hope

조지 프레데릭 왓츠(George Frédéric Watts)

by 위영



하루에 한 번쯤은 하늘을 보라는 강은교의 시가 있어요.

이십 대에 읽었던 시인데 지금도 자주 그 구절을 생각하며 하늘을 보곤 하죠. 걷는 시간이 주로 밤이라 밤하늘을 많이 바라봐요. 밤하늘의 색이 얼마나 다양한지 어둠과 깜깜함이 전부일 거라고 생각한다면 오스트리아와 오스트레일리아를 같다고 생각하는 것과 비슷한 일일 거예요.

우선 밤하늘은 절대 까만색이 아니죠. 오히려 맑은 날 밤하늘은 짙은 블루와 더 흡사해요.

그 블루의 결도 천차만별이죠. 거기다가 구름이라도 물려오고 몰려와 봐요.

밤의 구름은 낮의 구름과는 아주 판이하게 다르죠.

어두운 하늘을 배경으로 구름이 얼마나 신비로워지는지, 그 신비로움은 복잡한 인생사 정도쯤이야~~ 하게 하는 미묘한 체념을 유발하기도 하죠. 체념은 승리의 다른 이름이라는 것도 깨달아지면서 말이죠.

그러다가 하늘에 별이 보이죠. 아주 맑은 날이면 열 개 정도, 중간 정도 되는 날이면 다섯 개,

그것도 눈을 하늘에 고정하고 아주 열심히 바라보아야 해요.

어쩌면 별을 봐야 한다는 일념으로 정성 들여 바라볼 때 살짝 나타나는 것 같기도 해요.

별 보는 사람은 별 볼일 없다는 것을 별도 아는 것인가.... 블루 한 상상도 해보죠. 하늘을 삶이라는 공간으로 가정한다면 별은 희망으로 은유될 수도 있겠지요. 별이 안 보이는 날이 많은 이유를 알 듯도 합니다.

잘 보이지 않지만 조지 프레데릭 왓츠의 작품 <희망>에도 별이 있습니다.

있을 거다!라는 확신을 가지고 아주 열심히 찾으면 여인의 등 뒤쪽으로 리라와 약간 대각선 자리에 있어요.

하도 흐릿해서 딱 이즈음 별 같은 별이에요.

여인이 입은 옷은 살이 다 비치는 얇은 천인데 추워 보이네요. 작가는 저 옷으로 따뜻함이라고는 없는 신산스러운 세상을 표현하고 싶었던 걸까요? 그녀는 지구의처럼 보이는 둥근 구위에 앉아 있는데 조금만 구가 흔들려도 어디론가 쓰러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여요. 거대한 지구라고 할지라도 일엽편주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죠. 저런, 그녀의 맨발을 좀 보세요. 희고 고운 살결을 지니고 있음에도 고단한 삶의 얼룩이 가득해요. 그래도 무너지지 않으려고 그 발로 오른쪽 종아리를 감고 있어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요. 들려오는 것도 없어요. 그저 적막뿐이죠. 품에 안은 리라ㅡ그녀는 마치 리라가 자신을 지탱해줄 거대한 기둥이라도 되듯이 껴안고 있어요. 그녀는 리라의 현들이 다 끊어졌다는 것을 알고 있을 거예요. 그래도 하나 남은 현이 있잖아요. 하나의 현으로 켜는 소리가 조화나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지라도 그래도 소리잖아요. 음악이잖아요.

오른손으로 단 하나 남은 현을 연주하는 이 여인은 그 소리를 듣기 위해 귀뿐 아니라 온 몸을 악기 속으로 넣어버리는 것처럼 보여요. 마치 성냥팔이 소녀가 그 작은 성냥 불길 속에서 아름다운 꿈을 꾸듯이 단 하나 남은 음악- 단 하나의 희망-을 붙잡듯이 말이죠. 절망이 늪처럼 가득 에워싸고 끌어당긴다 할지라도 나 연주하리 희망이란 현을..... 희망이라는 꽃을 우습게 보지 마세요. 희망은 시시한 희망 속에서 피어나지 않아요. 희망은 절절한 절망 가운데서만 솟아나는 꽃이 예요.

실제 당대의 미술평론가들조차 작품 제목에 의문을 제기했다고 해요. “단 하나의 코드로라도 연주할 수 있다면 그것은 희망”왓츠의 대답이에요.

왓츠는 피아노 기술자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어려서부터 그림에 놀라운 재능을 보였어요.

18세에 왕립 예술원(로열 아카데미)에 입학했고 1843년에는 웨스트민스터 사원 벽화 공모에서 1등을 했어요. 이탈리아 유학을 갔고 예술 애호가인 발레리 캐머런 프린셉과 그 부인의 거처인 ‘작은 네덜란드의 집’에 21년간이나 머물렀다고 해요.

그는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였고 작품에 전념하는 것만이 예술가의 진정한 태도라고 여겼죠.

세상의 명성 같은 것에 초연해서 빅토리아 여왕의 남작 작위 제의를 두 번이나 거절했어요.

로열 아카데미의 원장 자리도 거부한 채 작품에만 매진한 예술가죠.

보헤미안 기질이 다분했던 왓츠는 권위나 고정관념을 우습게 여겼고 오히려 그것들을 타파하려 하려는 의지 때문에 사회에 대해서 매우 비판적이었어요. 그러니 평가가 후할 수 없었죠. 자신만의 세계에 깊이 침잠하고 내적인 진실을 찾는 왓츠에게 비평가들은 ‘영국 미술의 위대한 실패’라고 말했다니 말이죠.

<희망>은 그런 왓츠의 태도를 응축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어요. 왓츠는 의붓딸을 굉장히 사랑했는데 그 아이가 세상을 떠났어요. 가장 큰 절망은 결국 죽음에서 시작되겠지요. 바꿀 수 없는 별리잖아요. 그 상실감은 고통스러운 절망과 맞닿아 있었겠지요. 그런데도 여전히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이 그림으로 표현했을 거예요.

어떤 상황 속에서도 생은 이어져 간다. 가야만 한다는 슬픔 어린 희망을 보여주는 작품이죠.

작품과는 상관없는 이야기지만 버락 오바마가 최초 흑인 대통령을 꿈꾸며 캠페인에 사용했고 넬슨 만델라도 감방 벽에 걸어 넣고 수도 없이 보았다고 해요.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하는 것이 마음에 유익하기 때문이니라’ 전도서 말씀이 생각나요.

슬픔이나 근심이 마음에 유익하다는 것은 그 외로운 마음에 천국을 심을 수 있다는 뜻이겠죠.

2020년 <희망>을 가지고 전진해요. 우리.

<교계신문 연재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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