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양수와 김홍도
일엽지추(一葉知秋)와 추일사가지(推一事可知)는 전혀 다른 뜻처럼 여겨지나 그 지향점은 비슷하다.
한 일을 보며 열일을 아는 것이나 나뭇잎 하나 지는 것을 보고 가을이 도래함을 아는 그 속닥함이 이윽하다.
일엽지추의 일엽은 오동나무다.
오동잎은 서늘한 기운에 민감하다고 한다.
오동 가지 하나에 이파리가 열 두 개라 일 년을 나타낸다고 생각했다.
세월을 아는 나무라고 여긴 듯도 하다.
중국에서는 오동나무를 봉황이 깃들만한 나무로 여겨 궁에 심었다.
무성한 오동꽃...무성한 향기...무성한 이파리... 생각해보면 봉황새가 들 만한 나무 같기도 하다.
입추 무렵이면 태사관은 오동나무를 예의 주시했다.
오동나무 이파리 하나 너울거리며 떨어지면 가을이 왔어요.
태사관은 궁궐을 향해 소리쳤다.
한사람이 받아 다시 소리친다.
가을이 왔어요.
사람들이 이어가며 거기 ‘말의 길’이 생겨난다.
가을이 왔어요.....가을이 오네. 저기 오네 가을...
사람들 말길을 즈려밟고 가을이 온다.
과문해선지는 몰라도 나무 이파리 하나 솟는다 하여 봄이 왔다고 소리치지 않는다.
잎 무성하다 하여 하얀 눈 내린다 하여 여름 왔어요. 겨울 왔어요. 소리로 길을 만들지 않는다.
오직 가을! 만이다.
가을만이 지닌 아주 특별한 소리의 길!
구양수의 추성부(秋聲賦)는 나만의 가을 상례이다.
예민하고..아득하고...조촐하고...섬세한 글이다.
풍경을 그린듯하나 소리에 대한 이야기다.
가을 소리를 이야기하다가 생사로 흐른다.
푸나무를 바라보다가 사람의 정수를 헤아리게 되며 결국 삶의 이치까지 나아간다.
김홍도의 추성부도는 구양수가 지은 ‘추성부’를 그림으로 그려낸 시의도(詩意圖)이다.
가느다란 세필로 추성부 전문이 수록되어 있는데 마치 그림 속 잎 떨어진 나목처럼 글씨 자체가 쓸쓸해 보인다. 달무리 진 가을 밤..
보름달빛은 세상을 환하게 하고 앙상한 나무사이를 흐르는 계곡의 물은 더욱 눈부시다.
달빛 아래 빈집...이 있고...선비는 고요한 모습으로 글을 읽다 기묘한 소리를 듣는다.
“별과 달이 환히 빛날 뿐 사방에 인적은 없고 소리는 나무 사이에서 납니다.”
추성부의 백미인 동자의 말을 그려낸 그림이다.
잎 진 나무야 그렇다지만 붉은 감 가득 매단 감나무도 쓸쓸하기 그지없다.
노년에 이르러 인생무상을 느껴서인지 혹은 이미 가까이 다가온 죽음의 그림자 때문일까,
김홍도는 만능화가였다.
스승인 강세황은 단원은 못그리는 것이 없다고 까지 표현했다.
추성부 전문 뒤에 단구가 그리다(丹邱寫)가 쓰여 있다.
단구(丹邱)는 만년의 김홍도가 사용한 호(號)로 신선들이 사는 공간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 작품은 단원의 마지막 그림으로 추정한다.
김홍도. 육십 살. 살아갈 날이 짧아선지 살아온 세월이 더 잘 보이는 나이다.
더군다나 그는 사람들에게 잊힌 채 살아가고 있었다.
그의 집. 혹은 그의 마음은 동자승은커녕 사람 기척 없는 저기 저 산속의 집, 하얗게 비어있는 집이다.
구양수의 추성부보다 더 깊은....가을소리를 그는 실제 자신의 쓸쓸한 집에서 들었을지도 모르겠다.
묵을 갈고 필을 드네/빈 종이.....를 앞에 두네/ 눈을 감네/ 일필휘지 필요없네/ 조심스러운 마음가짐/ 섬세한 조탁/ 갈필로 가다듬네/
그림 문학에 취하다..저자는 가을소리가 들리는 그림......이라고 풀이하더라만 저기 더 깊은 산속 빈집...달빛만 들이차 있는 휑뎅그레한 집이 주는 느낌은 가을의 소리만이 아니라 인생의 가을을 섬세하게 나타내주고 있으니 단원의 추성부도는 구양수의 추성부와는 또 다른 절창이리.
좀더 깊게 가만히 응시하다 보면 구양수의 추성부에는 등장하지 않는 주인공들이 보인다.
절창을 아우르는 또 다른 결이라고나 할까,
우선, 마당가의 학이다. 신선과 선비를 은유하는 두 마리 학은 마치 가을을 어서 오라는 듯,
어쩌면 가을소리 보다 더 큰소리를 내겠다는 듯 작품의 전체적인 느낌과 다르게 생기 차다.
자신이 살아온 시간들을 나타내주는 것일까,
아니면 살아가고 싶은 삶의 태도를 보여주는 것일까,
앞 뒤 마당의 구멍 뚫린 태호석ㅡ어려움 속에서도 군자연한ㅡ도 크고 당당해서 거침없는 결기를 보여준다.
조락의 시간 속에서도 삶을 향한 그의 소망을 나타내 주는 듯한 종려나무(아마도 단원에게 대나무를 의미했을)는 잎 진 나무들과 다르게 싱싱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홍도의 추성부도는 전도자가 쓴 ‘일의 결국(헛됨)’을 그린 작품 같기도 하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전도서 12: 13) (교계신문 연재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