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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영 Dec 17. 2019

쇠딱따구리

 아주 오랜만에 산엘 갔다. 이젠 추위도 무섭고 세찬 바람도 무섭다. 정분(?) 난 북한산을 그토록 그리워하면서도 자주 못 가는 이유다. 차에 오르자마자 시디를 갈아 끼운다. 음악 듣기에 가장 좋은 곳은 차 안이다. 볼륨을 크게 해 놓으면 온 공간에 음악이 가득 찬다. 새어나가지도 못하고 계속 눌려 담아져 점점 음악의 힘은 세 진다.

마음이 편안할 때는 에프엠을 듣고 그렇지 못할 때는 음악을 골라서 듣곤 하는데 요즈음 주로 듣던 차이콥스키를 빼고 마리아 칼라스를 넣는다. 카스타 디바가 나오니 세상에, 마음이라는 풍선을 음악이 훅 불어 제치는지 순식간에 부풀어 오른다. 정결한 여신은 달을 의미한다고 한다. 평화를 달라는 간절한 기원이 어린 노래다. 마리아 칼라스 목소리에는 약간 쇳소리가 섞여 있는데 그 쇳소리가 노래에 강인한 힘을 주고 음을 분명하게 잡아준다. 놀라울만한 안정감을 주는 목소리, 누구나 굴복시키고야 말겠다는 단호한 목소리, 부드러움이 없는 디바다. 마리아 칼라스의 노래는 자신도 자신의 노래를 듣는 사람도 태워버릴 것처럼 공간을 태우는 사무치는 아리아다. 

 언제나 겨울 산에 오면 마치 의무라도 되듯이 시들은 이파리들을 한두 장 찍는다. 나무에 대한 사랑을 버리지 못해 동거하고 있는 미련의 잔재들이다. 사진이야 어차피 빛의 예술이긴 하지만 이렇게 깊은 겨울 시들은 이파리가 무에 어여쁘겠나. 근데 역광 아래면 다르다. 아픔이나 고통으로 대변되는 구멍과 헐거움 상처를 환히 비추어내면서 가슴속으로 스며드는 것들이 있다. 새로운 인식의 장 같은 것들이 형성된다고나 할까, 문득 사람에게도 그런 역광이 있을까, 선함 부드러움 다정함 온유함 지성 같은 것을 비추어내는,

 용혈봉 용출봉 의상봉 그리고 이름 없는 자그마한 봉우리 하나, 가장 높은 봉우리인 용출봉에 올라선다. 이어진 듯 홀로인 듯, 끝없이 아득한 산그리메가 펼쳐진다. 산을 좋아한 이유 중의 하나는 산그리메 때문이기도 하다. 그 거대하면서도 아득하고 아스라한 선들이 지어내는 선들이 얼마나 정적인지, 얼마나 고요한지, 장엄한 설교를 듣는 것 같기도 하고 가끔은 깊은 기도 속으로 들어가는 듯 순간 경건해지기도 한다. 하나님의 섭리와 사람의 작음을 깨닫게 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갑자기 휙 소리가 나더니 까마귀 한 마리가 바로 앞 나무에서 날아오른다. 내가 그렇게 힘들여서 내려오고 올라갔던 용혈봉을 휘이익~~ 이초 삼초? 사뿐하게 거쳐 하늘 저쪽으로 날아간다.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바라본다. 생명의 다름이 참으로 경이롭구나. 소소하지만 평생 다시 경험하지 못할 순간이 지금 지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선 지 이내 마음 한편이 서늘해진다.  선이 멋진 소나무에 기대앉아 커피 한잔 마시면서 한참을 무연히 앉아 있었다. 그리고 다시 걷기 시작했는데 톡톡톡 경쾌한 소리가 난다. 자그마한 쇠딱따구리가 졸참나무 위 높은 곳에서 나무를 쪼고 있다. 가만히 서서 딱따구리를 바라본다. 쇠딱따구리는 정말 작고 사랑스럽다.  겨울에는 나무의 열매를 먹는다고 하던데 저 나무속에 벌레 유충이라도 잠자고 있는 건가, 겨울나무라 더 단단할 텐데... 고요한 숲에서 나는 톡톡톡 거리는 단순한 소리는 소리를 지나 음악에 다다른 것처럼 아름답게 들려온다. 그리고 이내 눈물겨웠다. 세상에, 그 조그마한 새ㅡ 조그마한 새의 머리는 얼마나 조그마하겠는가, 또 그 작은 머리의 부리는 얼마나 작겠는가,  그 작은 부리로 나무를 쪼는데ㅡ 그냥 가볍게 톡톡톡 쪼는 게 아니었다. 난 사실 그런 줄 알았다. 가볍고 경쾌한 소리처럼 가볍게 톡톡톡 쪼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딱따구리는 꼬리 깃을 나무 가지에 기대고 발톱으로 나무를 붙들면서 그 조그마한 머리를 뒤로 젖힐 수 있는 한 젖힌 후 그 반동까지 이용한 힘으로 나무를 쪼아댔다. 그러니까 부리의 힘만이 아닌 온몸의 힘을 다해서 나무를 쪼고 있었다. 톡톡톡. 쇠딱따구리가 내는 소리는 존재를 향한 절체절명의 외침이었다. 존재하기 위한 필사의 동작이었다. 쇠딱따구리가 묻는 듯했다. 너는 저런 몸짓으로 살아왔던가, 

열한 시 사십 분부터 걷기 시작해서 차에 다시 탄 시간이 늦은 네 시 사십 분, 

생각해보니 언제나 발걸음보다 더 잰걸음이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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