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ood Samaritan

빈센트 반 고흐

by 위영



풀이 무성한 푸서릿길을 걷거나 나지막한 산에 경사지게 나있는 자드락길을 걷을 때 무엇보다 아무도 없는 나뭇잎 그득히 덮인 산길을 걸을 때면 길은 단순한 길이 아니라 사람들의 자취로 다가온다. 그 옛날 누군가 아무도 걷지 않았던 곳에 조심스럽게 첫발을 내 딛었을 것이고 다음 사람이 그 길을 따라 걸었을 것이다. 그렇게 사람의 발로 만들어진 다져진 길은 차츰 사람들에게 익숙해지며 단단한 길이 되었겠지. 그러니 모든 길은 당연히 보이지 않는 역사를 품고 있다. 마냥 변함없을 것 같은 길이지만 순식간에 돌변하기도 한다. 어두워진 하늘아래 작달비 내리면 빗길이 되고 함박눈 펑펑 내리면 눈길이 된다. 목적을 지니게 되면 심부름 길이 되고 학교 가는 길 직장 찾아 가는 길 아, 연인 만나러 가는 설레는 길도 될 수 있다. 걷는 길만 있는 것도 아니다. 비행기길 도 있고 기찻길도 있으며 물론 뱃길도 있다. 찻길이야 말해 무엇 할까, 모양에 따라 달라지고 크기에 따라 이름도 많다.

보이는 길 뿐이랴, 보이지 않는 길은 너무 많아서 헤아리기조차 어렵다. 늙은 엄마가 가는 길을 바라보며 내가 가야할 길을 아득하게 바라보다 눈 밝은 시인이 들어선 길에서 시가 펼치는 길을 기웃거린다. 따끈하게 데운 우유에 탄 라떼 커피 한 잔이 주는 길도 만만치 않다. 생각을 따라 오늘도 무수하게 많은 길을 걷는다.


빈센트 반 고흐의 <The Good Samaritan>은 환하고 밝은 작품이다. 고흐가 즐겨 사용하던 노란색과 푸른색의 대비가 선명하다. 짧은 선모양의 터치에서 생생하고 역동적인 느낌이 풍성하면서 아름답다. 휘어진 길이 그림의 하단을 차지하고 있다. 좁고 협착한 길로 절벽이 있는 작은 골짜기 길이다. 그래서 사람끼리 만나면 반가워서 저절로 하이! 하게 되는 길.

네 명의 사람이 보인다. 예수님 표현을 빌리자면 저 멀리 길 끝에서 아스라이 보이는 사람은 제사장이고 가까운 곳에서 고개를 살짝 돌린 채 못 본 듯 책을 들고 가는 이는 레위인이다. 강도를 만난 것이 분명한 텅 빈 가방과 아픈 사람을 무심히 지나쳐 가는 마음은 어떨까, 그들의 뒷모습은 어떤 앞모습 보다 더 정직하게 자신을 드러내고 있다. 실제 미셸 트루니에는 뒷모습의 사진을 가지고 글을 썼는데 뒤쪽이 진실이다고 선언했다.

강도에게 옷까지 탈취당한 사람은 온몸을 사마리아인에게 의지하고 있다. 부축한 사람의 무게를 감당하노라 허리는 휘어지고 다리 근육은 불거져 있다. 그가 온 힘을 다하고 있다는 것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말도 앞 다리를 모으며 힘을 태우고 있다.

누가복음 10장에서 율법교사가 묻는다. 내 이웃이 누굽니까?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님에도 예수님은 강도만난 사람을 보고 피해간 제사장과 레위인 그리고 그를 불쌍히 여긴 사마리아인을 예로 들어 친절하게 설명해주신다. 누가 네 이웃이냐? 율법교사는 대답한다. 사마리아인입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선한 사마리아인은 신앙을 가진 많은 화가들이 좋아하는 주제였다. 그러나 대다수의 화가들이 사마리아인과 강도를 당한 사람들을 주제로 그렸다. 고흐는 들라크루와의 착한 사마리아인을 모작했지만 작품 속에 레위인과 제사장의 뒷모습을 그림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더욱 서늘하게 구현해냈다.

선함 착함이란 아름다운 단어가 변했다. 착한 사람은 똑똑하지 못한 어리숙한 사람을 지칭하는 뜻이 숨어 있고 선한 사람은 칭찬할 만한 기능 없는 사람의 수사어가 되었다. 사람에게만 사용했던 사람의 단어 ‘착함’은 이제 음식 값이나 옷값에 사용되고 있다. 돈이 사람을 잡아먹듯이 사람에게 꼭 있어야 할 아름다운 덕목까지 대신 착복해버린 것일까, 착함이란 덕목은 이제 사람에게 필요치 않는 것이 되었을까, 그 의미와 가치는 사라져 버린 것일까,

리쳐드 도킨슨의 말처럼 사람에게 이기적인 유전자만 있다면 사마리아인의 선한 행위도 그저 칭찬이나 보상을 바라는 행위가 될 것이다. 그러나 영장류 학자 ‘프란스 드 발’은 인간과 가장 닮은 침팬지에게 실험을 했다. 줄을 당기면 음식을 주지만 대신 옆방의 다른 침팬지가 고통을 당하는, 침팬지는 배가 고픈데도 줄을 당기지 않고 참아냈다. 자신의 배부름보다 타인의 고통을 크게 여기는 ‘이타주의적 충동’이 침팬지에게는 있었던 것이다. 하물며 사람이랴...

앗시리아에 점령당한 사마리아는 혼종 정책에 의해서 혼혈민족이 되었고 유대인에게는 천한 이방인이 되었다. 예수님은 누가 이웃이냐는 질문에 혈통이나 민족이 중요한 것이 아니며 지위나 권력이 문제가 아니란 것을 짧은 문장 속에 담으셨다. 그러니까 이미 이천 여 년 전에 예수님은 소외된 자를 일으켜 세우신 것이다. 사람간의 구별을, 차이를, 다름을, 무화시키신 것이다. 사람 사이에 길을 내신 것이다.

빨간 모자를 쓰고 수염을 기른 사마리아 사람의 모습 속에 고흐의 모습이 보인다. 고흐의 심경은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자신도 사마리아인처럼 외로운 사람이라는 것과 사마리아인처럼 남을 돕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사람들의 이웃이 되고 싶다는 의도로 읽혀진다.

네 주변에 사마리아인이 있는가, 너는 네게 다가오는 사람들에게 사마리아인이 될 수 있는가, 너는 예수님이 가리키는 길을 가고 있는가, 고흐의 그림이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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