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콜라 푸생(Nicolas Poussin,1594-1665
니콜라 푸생(<아르카디아의 목동들>(1638-40, 캔버스에 유채, 85X121cm, 루브르 박물관)
유토피아는 토마스 모어가 만든 조어로 이상향을 의미합니다만 ‘장소’와 ‘없는’을 결합한,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곳을 뜻합니다.
길 잃은 사람이 복숭아나무 꽃 핀 길을 따라가다가 아름다운 동네를 만나게 되는, 세상과 격리 된 사람들이 평화롭게 살고 있는 도연명의 도화원기 역시 다시는 찾을 수 없는 곳으로 동양의 유토피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설 속 지명인 아름다운 설산속의 샹그릴라도 있습니다. 천천히 노화하며 일반적인 수명을 넘어 거의 불멸(不滅)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외부와는 완전히 단절되어 있으며, 모든 근심과 고통에서 해방되어 평화로운 생활이 가능한 천국으로 기록됩니다.
안평대군은 동생인 수양대군에 의해 죽임을 당한 비극적인 인물로 예술에 대한 소양이 깊었습니다. 특히 글씨가 빼어나 조선의 사대명필이었죠. 어느 날 밤 기이한 꿈을 꾼 후 그 꿈 이야기를 안견에게 했고 안견은 사흘 만에 비단채색화로 ‘몽유도원도’(이 아름다운 그림은 지금 일본에 있습니다)를 그려냅니다. 기암절벽을 병풍으로 옴팍한 자리에 복숭아꽃이 가득 피어나있습니다. 안견의 몽유도원도는 한국판 유토피아일수도 있죠.
무릉도원 역시 복숭아꽃이 만발하고 온갖 산새들이 우짖는 곳입니다. 어느 가난한 선비가 그곳 초당에서 배고픔과 시름을 잊은 채 행복에 젖어 있다가 깨어보니 꿈이었어요. 지금도 중국 남방 쪽에서는 아름다운 절경에 세외도원이라는 이름을 붙인다고 합니다.
복숭아꽃이 자주 등장하는 이유가 뭘까 나름 생각해보니 우아한 흰빛의 매화가 격을 따지고 있다면 복숭아꽃의 아련한 분홍빛은 자연스럽습니다. 소박하고 은근해서 누구든 선뜻 무장해제 시키고 맙니다. 쓸쓸한 마음을 지닌 사람이라 할지라도 화사하게 핀 도화아래 서있다면 복숭아꽃이 저절로 그 무상함을 상쇄해 줄 것입니다.
니콜라 푸생이 그린 <아르카디아의 목자들>입니다. 아르카디아는 그리스 사람들이 생각하는 유토피아로 베르길리우스의 『전원시』에서 유래되었지만 그리스의 실제 지명이기도 합니다. 목동들이 사는 곳으로 목가적인 평화가 흐르는 행복한 땅이죠, 아르카디아에 사는 세 목동과 여신(?)이 무덤 앞에 서있습니다. 나이가 지긋한 푸른색 옷을 입은 목동ㅡ아르카디아에서도 나이를 먹는다ㅡ이 무덤 앞에 새겨진 글을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읽고 있어요. 약간 입을 벌린 채 인정하기 싫다는 듯 뚫어져라 글씨를 바라보고 있지만 무덤에 비친 그의 그림자는 죽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아르카디아에도 나는 있다(Et in Arcadia ego)’ 무덤 안 사람은 아르카디아에서 살았던 사람이겠죠. 그러니 유토피아에도 죽음이 있다는 것을, 죽음은 어디나 존재한다는 것을, 그래서 죽음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을. 메멘토 모리! 푸생은 아름다운 그림으로 속삭이고 있습니다. 무덤에 기대서 눈을 아래로 하고 있는 목동은 깊은 생각에 잠겨있어요. 죽음을 생각해보지 않았는데 죽음이 다가온다니...나는 어찌 살아야 하는가. 죽음은 인간에게 가장 혼란스러운 대상이지요. 아무도 경험해보지 못한, 경험한 자를 만나지도 못한 알 수 없는 세상이 바로 죽음이니까요. 꿈꾸는 이상향은 당연 죽음이 없는 곳일 텐데 아르카디아 조차 죽음이 먼저 자리하고 있다는 거죠.
오른쪽에 선 목동은 무덤의 글귀를 가리키며 여신에게 묻고 있어요. 진실입니까? 그렇다면 나도 죽는 거예요? 여인은 목동의 등에 손을 얹고 있습니다. 위로해 주듯이 목동의 등을 몇 번 쓰다듬었을 것 같아요. 다정하고 우아해 보이지만 한편으로 그녀의 표정은 견고해보입니다. 목동의 어깨에 손을 얹은 여인을 '역사'의 알레고리로 해석한 사람도 있지만 혹시 푸생은 죽음의 모습으로 이 여인을 작품 속에 등장 시키지 않았을까요? 내 등에 손을 얹고 말하는 친구처럼, 한걸음이면 만날 수 있는 이웃처럼, 우리 곁에 존재하는 것이 죽음이라는 것을요.
작품의 배경은 평화로운 이상향을 나타내주듯 푸르른 잎사귀를 매단 나무와 절경을 암시해주는 먼데 산들이 어우러져 있습니다. 무덤 앞 네 사람의 주인공들 역시 안정적인 구도를 이루며 푸생의 미학을 구현해내고 있습니다. 네 사람의 시선은 각기 다른 곳을 향해 있습니다. 그래 설까요. 그림에서 흐르는 정적이면서 고독한 느낌은 작품에 또 다른 지적 신선함을 주고 있습니다. 무엇 하나 더하거나 뺄 것 없이 조화로운 구성에 색은 현묘해서 볼수록 아름다운 그림입니다.
17세기 유럽은 30년 전쟁과 함께 전염병으로 인해 혼돈의 도가니였습니다. 작가들은 무질서 속에서 바니타스를 외치며 해골과 촛불, 멈춘 시계와 쓰러진 술잔 등을 작품에 등장시켰죠. 흔들림 없는 조화와 균형을 지향하던 푸생은 고급한 은유로 <아카디아의 목동들>을 그렸고 바니타스는 작품 속으로 향기를 간직한 채 스며들었습니다. 푸생은 ‘프랑스 회화의 아버지’로 추앙받을 뿐 아니라 유럽 미술의 아카데믹 교본이 된 작가입니다.
그는 죽음을 평온하고 고요한 존재, 누구나 가야만 하는 공평한 섭리로 인식한 듯합니다. 그러니 소란스럽지 말라는 권면을 하는 것 같기도 해요. 지금 우리들이 조금씩 생각하는 웰다잉에 대한 개념 정리를 그는 벌써 끝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죽음에 대한 푸생의 고귀한 예술언어가 들리는 작품입니다.
몽테스키외는 그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는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죽음의 통로를 살짝 빠져 나가고 싶다고 했습니다. 누군가가 자신을 사랑해서 울면 가슴 아픈 일이고 가짜로 울면 울화가 치미는 일이라서, 고요하고 외로운 자신에게 알맞은 죽음의 길을 가고 싶다고 수상록 마지막 챕터에 있는 죽음론에서요.
푸르른 오월이니까, 아름다운 오월이니까, 살짝 죽음을 생각해도 좋은 시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