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람회의 그림

프렌치 모던: 모네에서 마티스까지, 1850-1950

by 위영
로댕.jpg



무소르크스키의 ‘전람회의 그림’을 들으며 글을 쓰고 있습니다. 무소르크스키와 친했던 화가 하르트만이 38이란 나이에 세상을 떠난 후 그를 위한 전시회에서 그의 작품에 대한 음악을 작곡합니다. 열 개의 그림에 대한 음악의 묘사가 흐르고 그 사이사이에 프롬나드(산책)가 흐릅니다. 전시회를 다녀와서 글을 쓰는 것이 마치 무소르키스와 함께 전람회장에서 산책을 하는 것 같습니다.

집에서 길하나 건너면 있는 야트막한 정발산을 건너가면 고양시 문화의 전당인 아람누리가 나타납니다. 전시장 뿐 아니라 소극장과 작은 갤러리들 음향기능 좋은 음악당 그리고 도서관 까지 가히 전 방위적으로 문화를 아우르는 곳입니다. 앞 건물보다 건물 뒤 정발산과 이어진 산책로는 아람누리를 더욱 정겹게 하는 곳이지요.

작년 늦가을에 제주도에 갔을 때 프렌치모던 전시회를 제주 도립 미술관에서 하더군요. 갈까 하다가 고양시로도 온다고 해서 사탕 아껴 먹듯이 미뤘던 전시입니다.

미술관에 갈 때 가장 신경 써야 할 것은 신발입니다. 미술관에 가면서 멋을 부리고 신발까지 깔맞춤하면 나중에 그림보다 신발에 신경을 쓸 수가 있습니다. 미술관에 혼자 가는 것도 추천합니다. 누군가와 동행한다는 것은 그만큼 신경의 분산을 의미하니까요. 좋아하는 사람과 데이트를 하는데 다른 사람이 끼어들면 그게 즐거운 데이트가 되겠습니까? 나는 그에게 집중하고 그도 나에게 집중해야만 온전한 데이트가 될 수 있겠지요. 더군다나 그는 나이도 많고 경험도 풍부해서 세상에 대해 눈이 밝습니다. 아마 나를 한눈에 척 보며 곁을 주어야 할지 말지를 결정할겁니다. 그러니 무엇보다 진실한 마음을 장착해야 합니다. 약간 경건해도 됩니다. 경건은 손을 모으듯이 마음을 모으는 순간이기도 하니까요. 자신의 작품을 기도하듯이 바라봐주면 좋겠다는 마크 로스코의 생각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는 색의 근원을 생각하며 삶의 근간을 궁구했을 테니까요. 자신의 작품에 자신의 영성을 담았을 테니까요. 로스코만 그랬겠습니까,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 사이에 오르내리는 작가의 작품들은 시절도 담고 있지만 그보다는 더 작가의 영혼을 닮고 있습니다. 명화를 친견한다는 것은 영혼과 영혼의 만남이라고 생각해도 좋겠습니다. 내가 그를 중시해야 그도 나에게 자신을 열어줍니다. 그것은 시디로 듣던 음악을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에서 좋아하는 지휘자의 지휘로 직접 듣는 것과 같은 일이니 그 현격한 차이야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설렘 경보죠.


코로나19 때문에 예약은 필수고 거리두기도 필수입니다. 도슨트도 수다도 없는 미술관은 그 어느 때보다 고요해서 좋다고 생각 했는데 좋은 작품 앞에서 오래 서있을 수는 없더군요. 뒷사람이 와야 되니까, 그다지 넓은 전시장이 아니고 매우 평면적인 곳이라 작품의 배치도 특별하지는 않았습니다.

작은 뜰이 있어선지 서울 도심 한가운데 있는 국제 갤러리의 전시는 언제가도 좋더군요. 얼마 전 문성식의 전시회도 전시장 벽면의 여백을 작품 사이즈와 함께 면밀히 연구한듯한 배치로 그림을 보는 기쁨에 전체 전시장을 더해보는 즐거움까지 주더군요.

장 밥티스트트 카미유 코로가 그린 ‘빌 다브레의 풍경’ 앞에서 숨이 훅 멎는 듯 했습니다. 그는 바르비종파였어요. 모더니티 시대가 오기 전 풍경화는 그림을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 천박한 품종(?)으로 여겨졌었죠. 어쩌면 그럴 수가.....라는 탄식은 역사 앞에서 자주 발하게 되는 익숙한 문장이죠. 그렇게 추론을 하다보면 우리의 현재 역시 어쩌면 그럴 수가...탄식을 할 수도 있겠지요.

빌다브레는 그가 살았던 곳이었어요. 코로의 풍경화를 특히 좋아하는 이유는 그가 표현한 나무와 숲 때문이기도 합니다. 숲이 나무고 나무가 숲인데 그의 나뭇잎들은 나무에 따라 차별을 드러내지 않아요. 나무가 되어 그저 아련하게 자연의 한 부분이 되어 숲이 되어갑니다. 마치 자연 속으로 화하는 듯한 형태라고나 할까요. 들판에서 일을 하는 몇 사람이 있습니다만 그들도 사람의 형태인 듯...그래서 인상파의 시작이라고 인상파에 대한 지대한 영향을 준 작가라고 코로를 말하기도 합니다.

어느 평론가는 <코로는 풍경화가가 아니라 자연의 슬픔과 기쁨을 호흡하는 풍경의 시인이다>고 말했습니다. 먼데 있는 하늘과 나무 그리고 집에 부딪히는 햇살 일하는 사람들과 호수위에 일렁거리는 빛들을 이렇게 아름답게 그릴 수 있다니 그는 정말 풍경의 시인입니다.

세잔의 미완성 작품 ‘가르단 마을’도 세잔의 특색을 여실하게 지니고 있는 그림이었습니다, 종탑이 잇는 교회와 집들은 그의 각이 엿보였고 나무들은 그 각들에 생기를 불어넣고 있었지요.

‘빛이 색이다’라는 인상주의 원칙에 가장 철저했던 모네의 작품 밀물은 윤슬로 일렁이는 바다의 색과 빛을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었어요.


크지는 않지만 로댕의 조각품도 세 작품이나 있었어요.

생화(?)를 보는 즐거움은 조각 작품에서는 더해지지요. 옆모습 뒷모습까지 볼 수 있으니까요.

‘발자크’와 ‘다나이드’도 인상적이었지만 ‘아름다운 아내’라는 작품 앞에 오래 서있었어요.

바위 위에 고개를 숙인 채 벌거벗은 늙은 여인을 조각한 작품이었어요.

시들은 젖가슴과 살이 없으면서도 아이 때문에 부풀었던 자욱이 선명한 늘어난 배....

그 시절 어떤 조각가는 로댕의 조각 어디에서도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없다고 했다는군요.

시들은 몸에 아름다움이 없다는 것은 결국 그가 보이는 것에만 집중한 눈이 엷은 사람이라는 연설을

자기 자신에게 한건데, 로댕은 그보다 훨씬 더 시대를 앞서간 사람이었던 거죠.

단순히 아름다움에 기준이 없다는 현대미술을 소환하지 않더라도

로댕은 섬세한 눈초리를 지닌, 겉이 아닌 내면의 아름다움을 생각한 사람이었던 거죠.


쟝프랑스와 밀레, 베르트 모리조, 마르크 샤갈, 앙리 마티스 에드가 드가, 피에르 보나르. 조르쥬 루오 쿠스타브 쿠르베, 알프레드 시슬레 외젠 부댕, 라울 뒤피등 책이나 인터넷에서만 보던 화가들의 사인이 들어간 작품ㅡ프렌치 모던: 모네에서 마티스까지, 1850-1950 전시회ㅡ을 고양 아람누리에서 볼 수 있습니다.


세잔.jpg
밀레.jpg
코로.jpg
클로드 모네, 밀물(Rising Tide at Pourville),.jpg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