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슈도드에서 창궐한 전염병

니콜라 푸생<1594~1665>

by 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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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프고 우울한 날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봄이 오고 있는데 말이지요. 꽃이 피거나 새순이 돋지 않아도 숲은 이미 변해 있습니다. 그러니까 움이 트려는 몸짓을 시작한 거죠. 가까이서 보면 조그마한 돌기들이 살짝 부풀려 보이지만 멀리서 바라보면 그것들이 함께 모여 전체적으로 아주 조금 들썩인다고나 할까, 겨울 내내 삐쭉했던 산이 한결 부드러워졌어요. 형언할 길 없는 봄 분위기가 스미어 든 거죠., 색의 변화도 있어요. 저게 뭐지, 하며 의심하게 만드는 색으로 변화의 빛이라고나 할까, 역시 형언키 어려워요.


너무나 익숙했던 소소한 일상들이 사라졌습니다. ‘사회적 거리두기“ 라는 낯선 문장이 선생이 되어 우리를 이끌어 갑니다. 다가서지 마라니요. 우린 평생 가까이 하기 위하여 노력하며 살아온 사람들인데요. 정겨운 사람들과 차를 마시는 작은 행복조차 마음 놓고 하지 못합니다. 공원에서 사랑스러운 아이들을 만나도 눈 맞춤은커녕 멀리 돌아서 지나갑니다. 모두 다 아는 얼굴이라 주일예배를 드리긴 했지만 함께 밥도 못 먹었습니다. 마치 한겨울에 문을 열어 놓은 것처럼 서늘한 기분이었어요. 쇼오펜하워가 그랬어요. 자신의 불행을 이기는 방법은 남의 더 깊은 불행을 바라보는 일이라고, 뭐 그다지 품격 있는 사유는 아니지만 저절로 전염병 그림을 찾아보게 되니 사실 같기도 합니다.


니콜라 푸생의 <아슈도드에서 창궐한 전염병>입니다. 아슈도드Ashdod는 이스라엘 남서부에 있는 도시의 이름으로 성경에서는 아스돗이라고 번역되었죠. 엘리 제사장 때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쳐들어와 법궤를 빼앗깁니다. 법궤를 아스돗에 가져다 놓으니까 아스돗 사람이 독종에 걸리고, 가드로 옮겨 놓으니까 가드 사람이 독종으로 죽습니다. 에그론으로 옮겨 놓으니까 에그론 사람이 독종에 걸립니다. 어떤 의학자들은 페스트였을 거라고 진단하기도 해요. 근거가 없지는 않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궤를 돌려보낼 때 전염병이 없어지길 기원하는 마음으로 독종(tumor)과 쥐를 황금으로 만들어서 보냈거든요. 페스트균은 쥐로 대표되는 설치류에 기생하는 쥐벼룩을 통해 옮겨집니다. 근데 참 우습게도 한 때는 이 벼룩을 건강의 지표로 삼았다고 해요. 해충은 건강한 몸을 숙주로 삼기 때문에 벼룩이 있다는 것을 건강하다는 증거로 여긴 거죠.


니콜라 푸생은 독종을 페스트로 여긴 듯해요. 그림 여기저기서 쥐가 출몰하고 있거든요. 길에서 통곡하는 사람, 아파서 움직이지도 못한 채 쓰러져 있는 사람, 시체를 떠메고 가는 사람들, 저 뒷면에는 여전히 다곤에게 기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헐벗은 옷을 입은 사람이 잘 차려입은 사람에게 살려달라고 하는 모습도 보입니다. 전면의 남자들은 다곤의 신전에서 나온 사람들 일거예요. 두려움과 겁에 질려 있는 표정입니다. 법궤가 다곤 신전 앞에 놓여있습니다.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또다시 엎드러져 얼굴이 땅에 닿았고 그 머리와 두 손목은 끊어져 문지방에 있고(삼상5:4)” 성경 그대로의 장면입니다. 그런데도 그들 중 아무도 여호와의 궤를 바라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저 도망치기에 급급한 모습입니다. 오직 얼굴이 보이지 않는 한사람만 여호와의 궤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습니다. 그는 당신인가요? 마음속으로 묻고 있을까요. 몸 움직일 기력도 없는 아빠와 거의 다 죽어가는 엄마 곁에서 놀고 있는 아이도 보입니다. 화면 중앙에 어린아이가 바닥에 쓰러져 있는 엄마의 젖을 먹다가 하늘을 바라보며 울고 있습니다. 피부의 빛깔로 삶과 죽음이 나눠져 있습니다. 여인 옆의 또 다른 아이는 죽음을 보여줍니다. 아이의 얼굴은 엄마를 향해 있습니다. 죽은 아내 앞에 서 있는 남자는 상체를 구부린 채 한 손으로는 입을 막고 한 손으로는 울고 있는 아이의 머리를 만지고 있습니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습니다. 이층에서 그 장면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저들의 우두머리일까요. 자세로 보아 넋이 나간 듯합니다. 그의 참모임이 분명한 사람은 아, 세상에 어찌 이런 일이...하듯이 머리를 감싸고 있습니다. 사람이 많은 광장이 전면에 배치되어 있는데 어쩐지 더 많은 곳으로 퍼져나갈 것 같은 느낌을 줍니다. 그러나 맨 오른쪽의 아이를 보면 희망이 보입니다. 건강하고 씩씩한 모습입니다. 발걸음은 당당하고 얼굴은 환합니다. 모든 사람이 병과 죽음 앞에서 두려움에 젖어 떨고 있는데 아이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아 보입니다. 니콜라 푸생은 미래를, 희망을, 구원을, 이 아이에게 투영한 것일까요.


17세기 르네상스 시대 후 바로크 시대가 도래, 안니발레 카라치의 아카데믹 혹은 신고전주의 라는 화풍과 카라바조의 자연주의라는 두 사조가 발전하게 됩니다. 푸생은 신고전주의를 계승, 회화 창작은 그 주제기 위대해야 한다는 '장려양식(Grand Manner,일명 푸생주의)으로 확장 시킵니다. 종교적인 테마를 많이 그린 푸생은 이 작품 ’아슈도드에서 창궐한 전염병‘이라는 제목으로 1700년 여 년 전의 사건을 현실화 했습니다. 필자역시 수백 년 전의 작품을 소환해 현실의 체기를 달래고 있습니다.


앙드레말로는 과거의 시간을 가져다 글을 쓰지 않는다고 했는데 그거야 뛰어난 선생이나 가능한 이야기고 삼월 하면 으레 보성의 삼월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어요. 주변마을보다 조금 더 아주 조금 더 높은 곳, 그래서 삼월인데도 서늘했어요. 차가운 안개가 자주 끼어 그 안개 탓에 차나무가 잘된다고 하더군요. 일 년 후배인 인 그 아이를 우연히 읍내에서 만난 것도 삼월이었어요. 어둑한 저녁 무렵이었는데 그 아이 품에 꽤 여러 송이의 수선화가 안겨있었어요, “수선화가 피어났는데 하도 이뻐서 친구에게 가져다주려고.....” 정말 참 사소한 수선화 꽃 몇 송이 이야기인데 삼월이면 꼭 생각나는 이유를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삼월이에요. 꽃이 필거예요. 봄꽃이 무적의 함대처럼 밀려 올 거예요. 그래서 소소한 일상도 이어질 거예요.

(교계신문 연재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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