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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영 Apr 13. 2020

자족하는 법

거리두기







어젯밤 북클럽 모임에서 격이 실종된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에 우리는 동의했다. ‘주위 환경이나 형편에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분수나 품위’라는 格에 대한 사전적 정의는 아무리 고상한 성품과 우아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 할지라도 주위 환경이나 형편에 자연스럽게 어울리지 않는다면 격이 아니라는 이야기도 품고 있다. 어떻게 보면 우선되는 것이 개인이 지닌 격보다는 어울림이 먼저라는 뜻풀이도 된다. 


格은 나무 木과 각각 各으로 이루어져 있다. 나무의 거리에서 격이 파생하는 것이다. 나무는 절대적으로 어느 만큼의 거리가 있어야 클 수 있고 자랄 수 있다. 나무가 나무다운 격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어쩌면 나무가 지닌 격 즉 거리를 필요로 하는 태생의 여건일 수도 있다. 그 거리가 서로의 존재에 대해 인정하고 배려를 지니고 있다는 뜻으로 비유될 수 도 있지 않을까, 생명의 신비로움은 때를 품고 있기도 해서 마치 어린아이 일 때는 사람들과의 거리가 친밀할수록 좋듯이 묘목일 때는 그 거리가 좁아야 한다. 나무 학자의 말로는 묘목은 옆 나무를 의식하고 견제하면서 혹은 경쟁하면서 수욱숙 자라게 된다고, 


 거리는 경망스레 일희일비하지 않고 설령 사랑 한다한들 가까이 다가서지 않고 이윽히 건네다 보는 것, 거리가 있으므로 자연스러운 객관화가 되고 거리가 있으므로 서로에 대한 침해를 하지 않는다. 

나무는 의연하게 ‘홀로’이면서 숲이라는 ‘우리’를 만들어내고 있다.     

예전에는 지성과 사리분별이 격을 불러온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만큼 살아보니 지성도 헛물이고 사리와 분별도 자신의 이해득실에서 만큼은 힘을 발휘 못하더라. 어젯밤 북클럽 모임에서 나는 순전한 격을 보았다. 철강회사 대리(대표이사의 약어)이신 홍공께서 가져온 열다섯 장의 편지가 그것이다. 홍공이 가방에서 제법 많은 장수의 서류를 꺼낼 때 우리는 무슨 서류지? 의아했다. 홍공은 아주 자랑스러운 모습으로 그 서류, 아니 편지를 우리 앞에 펼쳤다. 그것도 이즈음 도무지 보기 힘든 자필로 써진 무려 열다섯 장의 편지였다. 으아! 이게 뭔교? 홍공을 제외한 공들이 모두 놀라며 물었다. 


편지의 시원은 이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홍공께서 탄탄한 철강업계의 대표이사가 되었을 때 대리점들을 초도순시했다고 한다. 그런데 아주 판매실적이 좋은 대리점을 방문했을 때 나이 지긋하신 대리점 점주께서 홍공께 선물을 주셨다고 했다. 세상에, 책 선물이었다. 쇠 만지는 철강업 CEO와 대리점 사장의 만남에서 책선물이라니, 우리 북클럽에서 가장 통찰력 있게 책의 상황과 맥을 잘 짚어내는 홍공께서 놀랍고 감동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 ‘아 저두 책을 좋아합니다.’ 하면서 우리 북클럽 이야기를 하셨다는 것이다. 분위기야 화기애애했을 것이고 그 이야기는 사실 우리에게도 제법 큰 감동이었다. 작년 말 홍공께서 다시 대리점 시찰을 하게 되었을 때 이번에는 홍공께서 대리점 점주께 선물을 했다. 우리 북클럽에서 읽은 책 중 아주 좋았던 ‘길 위의 철학자’를, 그리고 홍공께서는 서류봉투에 담긴 등기 편지를 받게 된다. 칠순이 지척이신. <허허당에서 샘물할베>가  길 위의 철학자를 읽고 쓴 독후감이었다.     


저절로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가, 나이 지긋하신 분이  ‘길 위의 철학자’를 정독하며 읽는 모습이, 책 읽는 모습보다 더 아름답게 흰 종이를 펼치고 독후감을 적는 모습이. 그리고 열다섯 장이나 되는 독후감을 봉투에 담아 우체국에 가서 등기 편지를 보내는 모습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자수성가하며  평생 장사를 해 오신 그분이 책을 즐기는 모습은 학자들이 책을 가까이하는 것과는 전혀 맥을 달리한다. 흉내 내기 어려운 우아함이며 극진한 서정이다. 결 다른, 혹은 깊이 있는 인생을 살고 싶어 하는 이 시대의 귀족이 아닐까, 우리의 홍공도 대단하다. 그 서류봉투에 담긴 독후감을 소중한 그림처럼 반으로 구기 지도 않고 아주 반듯하게 담아 와서 보여주고 다시 반듯하게 담는 모습도 참 고와 보였다.     


엄마는 초등학교 졸업도 못하고 겨우 언문이나 깨치신 분이지만 아흔이 될 때 까지도 이렇게 놀아서야 되겠냐는 말씀을 하셨다. 지금 아흔다섯이신 데도 반석 위에 선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아픈 언니를 위해 혼자 철야를 하시곤 한다. 삶에 대한 한결같은 근면함과 믿음을 보며 지성과는 전혀 상관없는 단호한 격을 느낄 때가 있다. 사람의 격은 어떤 보이는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삶에 대한 진지함과 순전함 속에 거하는 것,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한 폐해가 많다. 그러나 그 폐가 남을 위한 것이라니 더욱 잘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비천하게 살 줄도 알며 풍족하게 살 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배고프거나 넉넉하거나 궁핍하거나 그 어떤 경우에도 적응할 수 있는 비결을 알고 있습니다.’‘내 처지가 어려워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어떤 처지에서도 자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바울이 살아가는 방법은 단순한 처세가 아니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삶에 대한 적응뿐 아니라 타인에게로 향하는 열린 삶의 방법이다.

사람 적을 시간에 정발산을 간다. 사람이 다가오면 살짝 피하기도 한다. 너무나 사랑스러운 아이들을 보면 평소 같으면 그냥 지나가지 못해 눈이라도 마주치며 까꿍을 해야만 했으나 이젠 아이들이 오면 더 멀리 돌아간다.  나이 들어 갈수록 혼자일 시간이 많아질 것이고 그렇다면 지금이 그때를 위한 학습 중일 수도 있겠다.


속절없는 봄이 지나가고 있다.

하얀꽃 구름처럼 피어나기 시작한 귀룽나무 한그루로 봄이 충분할 수 있다면 자족할 수 있는 적응의 비결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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