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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영 Apr 16. 2020

무담시

김선우


                                                       (초저녁,  새순이 옅은 밤속으로 피어나고 있었다)


속이 꽉 찬 배추가 본디 속부터/ 단단하게 옹이 지며 자라는 줄 알았는데/겉잎 속잎이랄 것 없이/저 벌어지고 싶은 마음대로 벌어져 자라다가/그중 땅에 가까운 잎 몇 장이 스스로 겉잎이 되어/나비에게도 몸을 주고 벌레에게도 몸을 주고/즐거이 자기 몸을 빌려주는 사이 결구가 생기기 시작하는 거라/알불을 달듯 속이 차오는 거라/마음이 이미 길 떠나있어 /몸도 곧 길 위에 있게 될 늦은 계절에/채마밭 조금 빌려 무심코 배추모종 심어본 후에/알게 된 것이다/빌려줄 몸 없이는 저녁이 없다는 걸/내 몸으로 짓는 공양간이 없이는 /등불 하나 오지 않는 다는걸 /처음 자리에 길은 없는 거였다//빌려줄 몸 한 채


몸져누운 어머니의 예순 여섯 생신날/ 고향에 가 소변을 받아드리다 보았네/ 한때 무성한 숲이었을 음부/더운 이슬 고인 밤 풀여치들의/ 사랑이 농익어 달 부풀던 그곳에/ 황토먼지 날리는 된비알이 있었네/ 비탈진 밭에서 젊음을 혹사시킨 /산간마을 여인의 성기는 비탈을 닮아 간다는, 세간 속설이 내 마음에 천둥 소낙비 뿌려/ 어머니 몸을 닦아 드리다 온통 내가 젖는데 /겅성드뭇한 산비알/열매가 꽃으로 씨앗으로 흙으로/되돌아가는 소슬한 평화를 보았네/부끄러워 무릎을 끙 세우는 /어머니의 비알밭은 어린 여자아이의 /밋밋하고 앳된 잠지를 닮아있었네/ 돌아갈 채비를 끝내고 있었네//내력


김선우의 시를 베끼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 뭘 베끼는 것인데.....이 시 두 편을 오자 없이 곱게 그리고 천천히 베꼈다. 손으로 톡톡 자판을 누르며 세 번 정도를 함께 읽어 낸다. 

아침에는 사뮈엘 베케트의 책을 뒤적거리다가, 뒤적거릴 수밖에 없었다. 진도가 나가질 않았고 하이데거의 숲이 논리적이라 어려웠다면 사뮈엘 베키트의 글은 논리도 없는 채 날아다녔다. 그러니 뒤적거릴 수밖에 없었다. 앞에 작가 년보를 읽다가 뒤에 역자의 말을 읽다가 중간 중간 쉬운 듯 해 보이는 제목을 따라서 읽다가 그렇게 뒤적이다가 문득 발견한 건데 내가 사뮈엘 베키트를 내내 페터 한트케로 알고 읽고 있었다는 것, 

사뮈엘 베키트가, 아니 페터 한트케는 독일 사람인데..... 그리고 노벨상을 작년엔가 탔는데 65년? 

이상하네, 그가 아일랜드인이었나? 하다가 알았다. 사뮈엘 베키트지 페터 한트케가 아니란 것을 

페터 한트케 보다 더 전 사람인데 페터 한트케의 글보다 더 어려운 것은 뭐라냐,

그러고 보니 사뮈엘 베키트의 글은 처음이다. 그의 고도우를 기다리며.....연극을 본 것 외에, 

그러다가 지루해서 펴든 김선우의 글은 얼마나 명료한지, 

명료하니까 칼날도 선명하더라만, 

김선우에게 지인이 말했다. 문학이나 하지 웬 정치 칼럼을? 조지 오웰의 말 ‘예술은 정치와 무관해야 한다는 의견 자체가 정치적이라고’그래서 김선우는 말하고 있다. 문학은 필연적으로 정치적이라고, 

젊은 그녀는 나보다 몇 백배 세월호의 아픔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니 아픔이 언제나 성숙과 함께 한다는 거지, 사랑과 동행한다는 거지, 좋은 사람이라면 아주 아주 깊이 있는 좋은 사람이라면 타인의 아픔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는 마음 밭이 넓다는 거지, 

이런 글을 읽으면 얼마나 내 삶이 옹졸한지 알아진다. 

그릇대로 사는 겨, 혼잣말을 해보는데도 썩 편치는 않다. 

나는 정치를 잘 모르겠다. 선거 날이 되도 정당을 보고 찍어야 하나 사람을 보고 찍어야 하나를 잘 구분할 수 없고 사람도 정당도 마음에 안들 때는 투표를 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나의 이익도 생각해야하고 나라의 먼 미래를 생각 해야 할 텐데....이렇게 되면 너무나 어려워서 나 아니어도 모두 잘하겠지 하다가도 그래도 하며 투표를 했다. 


김선우는 야만의 세상이라고, 즉 야만을 잘 아는데 나는 야만도 잘 모른다. 

그래서 그녀의 글을 읽으며 부끄러웠다. 

무엇이 야만인가, 나는 그녀의 글을 읽으며 야만을 생각했다, 강정, 세월호, 노동자,  야만은 양심이 살아있어야 보이는 것이다. 정치의 야만 사회의 야만, 그 야만 중에서 아주 큰 야만이 묵인이며 무지다. 나는 야만을 묵인하고 야만에 대해 무지하다. 묵인과 무지는 벗 같기도 하다. 내 삶의 한 모습 같기도 하다. 오래전이지만 가령 대처의 사망 기사를 보고 나는 그냥 그런갑다. 그렇게 읽어냈는데 김선우는 ‘성찰의 기회를 박탈하는 냄비언론은 부고 기사에 까지 적나라하게...... ’ 나는 비교적 양심적으로 산다고 생각하는데 치열하게 사는 사람 앞에 서거나 단호한 글을 읽을 때면 내 양심은 양심도 아니다.


그런 김선우가 저리 서정적인 시를 쓴다. 

아우슈비츠 이후 더이상 서정시를 쓸수 없다고 아도르노가 말했는데 ,  나는 서정을 무척 좋아한다 

(키 작고 살찌고 미모 없고 그리고 이제 늙기까지 한 내가 지닌 유일한 아취라고는 서정을 느끼는 촉!)

그 서정은 일종의 해찰 일종의 곁다리 일종의 추신 일종의 총총 일종의 사족 같은 게 서정이다 

사실 서정으로 짜여진 시라면 약하고 여리다. 

그러니 진짜 힘 있는 시를 쓰려면 배추라는 소재를 통해서 사람의 길을 잘도 밝히는 저런 시를 쓰려면 

서정은 어디쯤 어울릴만한 곳에 살짝, 시금치 나물 마지막에 살짝 넣는 참기름처럼 거기 어디 살짝, . 배추이야기 하다. 살짝, 나타나야한다. 내려앉던가, 

/마음이 이미 길 떠나있어 /몸도 곧 길 위에 있게 될 늦은 계절에 /

이봐라, 마음길 몸길 그것도 늦은 계절.....아흐~ 가 저절로 나오는 대목, ‘살짝서정’이라고 이름 해 볼까나, 


내력은, 참, 슬픈 시다. 근데 엄마를 사랑해선지 김선우는 약간 웃프게 표현했다. 소리 나는 대로 읽으면 더 미묘한 느낌의 시다. 아마 시인이 생각지 못하고 쓴 어떤 부분을 독자들이 읽으면서 알아채기도 하는 시가 아닐까,  비탈이 무려 다섯 번이나 나온다. 비알은 비탈이다. 가파르게 기울어진.......그리고 다가오는 소슬한 평화......

나도 예순여섯이 지척이라는 것, 그래서 그런지 오메....저 시가 참 잘도 읽어지더라는 것,  

무담시  슬프더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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