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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영 Apr 20. 2020

<엘가나 장로>

 

나이가 들어갈수록 점점 <사랑> 에 대한 개념이 묵지근 하게 변해가, 무게만이 아니라 형체도 형상도 달라져간다니까, 젊을 때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들리지 않던 것들이 이제 들려오듯이 사랑에 대한 개념도 확장되어 간다고나 할까. 가령 젊을 때는 긍휼을 사랑이란 분류에 넣지도 않았지. 설렘은커녕 누추해 보이고 아름답기는커녕 지루함이 그득한데 어디 그 속에 사랑을 담겠어. 동정에 기인되어 있는, 강자의 입장에서 가볍게 할 수 있는 어떤 것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했는데 이젠 알아. 긍휼 속에 배인 크고 깊은 사랑을. 사랑이 깊을수록 커다란 긍휼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긍휼 없는 감정 감상 정서는 사랑이 아니란 것을, 


 언니가 처음 쓰러질 때가 오년 전이었지. 재활병원에서 팔 개월을 지내다가 설에 명절을 쇠러 왔었어.  아직 의자에 앉기에도 힘이 부치고 화장실도 부축을 해야만 갈수 있는데 언니가 원한다고 먼 길을 와준 형부가 너무 고마웠지. 엄마, 동생이 있어도 언니에게는 형부가 가장 임의로운 사람이더군. 내가 언니를 부축하려고 해도 형부만 의지했으니까, 나흘인가 지나고 다시 병원으로 떠나는데 언니를 보내는 마음이 정말 미어지더군. 내가 그럴진대 엄마는 오죽하셨을까. 다음날 그러시는 거야. “아야 아까 느그 언니랑 전화 통화를 하고 낭께 인자사 숨이 좀 쉬어진다. 느그 언니가 차를 타고 떠날 때 느그 언니 눈에 눈물이 고인디 아이고 누가 내 맘을 칼로 싹싹 후빈 것 같드라,  참, 이상하드라야. 기도를 해도 눈에 선하고 말소리가 막 들리고, 느그 언니한테 가고 싶은디 그라믄 늙은이가 미쳤다고 할 것이고, 간단들 늙은이가 뭣을 해주겄냐, 하도 죽겄어서 저그 땡땡(바짝) 모른(마른) 명태를 가져다가 한없이 찢었어야. 뭣이라도 하믄 잊어질랑가 싶어서, 그라다가 오늘 아침에 느그언니 목소리를 들응께 인자 좀 살겄다.” 

 언젠가 엄마가 갑자기 물으시더군. “아야, 그 한나 남편 그 이름이 머시냐,” “아 엘가나요?” “응, 한나가 애기를 못 낳고 울고 있승께 엘가나가 한나한테 말하지 않드냐, 남편인 자기가 열 아들보다 낫지 않냐고... 느그 형부가 꼭 그 엘가나다.” 어찌하여 울며 어찌하여 먹지 아니하며 어찌하여 그대의 마음이 슬프냐? 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아니하냐”(삼상 1:8) “맞아. 엄마 정말 형부는 엘가나셔.” 그래서 우리끼리는 형부를 엘가나 장로로 부르고 있지.


지극정성으로 언니를 돌보고 함께 걸으며 운동을 시키고 수많은 재활치료를 언니와 함께 했었지. <새벽기도를 가기 위해 옷을 입히고 모자를 씌우고 신발까지 신겨 함께 기도하러 가는 남편, 기도회를 다녀와서 아침밥을 하며 아내의 청에 의해 노래를 부르는 남편, 아픈 아내와 함께 토요일마다 교회 청소를 하는 장로, 너무도 확실한 의와 평강의 열매를 내 눈으로 보았네. 남도의 길만 祕境이 아니었어. 미평교회 박부장로님 위방엽 권사님 가정에도 祕境과 悲境이 혼재해 있네. 이런 아름다운 풍경 어디 또 있을까> 여수에 다녀와서 이 글을 쓴 게 작년 사월 하순이었어. 눈부신 봄날들을 우리 함께 했었지. 이만해도 감사합니다. 하며....그리고 오월에 언니가 두 번째로 쓰러진 거야.

  

 일 년여가 되는 지금까지 형부는 하루도 빠짐없이 언니 곁을 지키시네. 아픈 사람은 아픈 사람이고 산사람은 산사람대로 살아야지 않냐며 제발 집에 가서 편히 주무시라고 해도 병원이 더 편안하다고 하셔, 한결같은 진심을 느낄 때는 정말 형부도 언니처럼 우리 같은 보통 사람과는 조금 다른 곳으로 이주해 가신게 아닌가, 우리 모두 몸이 편하기 위해서 애쓰며 살아간다면 형부는 몸을 떠나 마음이 주는 평화 속에서 거하시니 말이야. 


 날 때부터 눈먼 자에게도 예수님이 말씀 하셨지. "자기 죄 탓도 아니고 부모의 죄 탓도 아니다. 다만 저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스스로 움직이거나 말도 못하지만 언니의 눈빛은 맑고 슬퍼 보여. 어느 땐 아주 깊은 생각에 빠져 있는 것 같기도 하지. 소통하는 기능이 상실되었다고 해서 영혼의 상실은 아니란 것을 언니 눈빛은 선명하게 말해주고 있는 것 같아. 언니를 보고 돌아올 때 가끔 그런 생각을 했어. 우리는 갈 수 없고 볼 수도 없지만 주님은 밝히 아시는 곳, 주님이 허락하신 다른 상황 속에서 언니가 살아가는 것 아닌가,  언니를 생각하며 욥기를 자주 묵상해. 욥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셨지. 잠잠하라!고. 생각해보니 잠잠하라!는 순종하며 인내하고 기다리는 자세네. 언니가 몸이 아픈 욥이라면 형부는 사람들과 친구들, 아내 앞에서 더 외롭고 힘들었던 마음 아팠던 욥일까. 

고맙다는 말 한마디 못하는 언니 곁에서 형부는 마치 커다란 나무처럼 변함없이 서있어. 언니는 언제 침묵의 세상에서 귀환할까,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오늘도 언니와 엘가나 장로님께 주님의 긍휼을 빌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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