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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영 Apr 10. 2020

귀룽나무 로그인

정발산 소경

 


길하나 건너면 정발산이예요.  

가까운 동네 산이란 게 일단 시시하죠. 가까움이 모든 시시함을 불러와요. 매일 만나는 가족들 이웃들 익숙해서 별 감흥이 없는 거죠. 그게 젊었을 적 이야기.   

가까운 것, 작은 것들에 고마워지고 익숙한 것들에 배어있는 깊이와 소중함이 느껍게 다가오면 나이 든 거고 철학자가 되는 거죠. 이즈음 코로나 바이러스도 우리를 철학자로 만들어가지 않던가요. 


하이데거의 숲을 읽긴 했어요. 높은 산 정상에 오른 것처럼 읽어낸 거죠. 굉장히 거친 돌뿌리 가득한 산길이었어요.  턱턱 걸리더라구요. 몇 문장 읽다가 가만 이게 뭐였지 다시 돌아가야 하고 돌아가서 차분하게 읽어온다 해서 알아지냐면 다시 주춤거리고, 그게 남의 생각, 그것도 보통사람과는 결이 다른 독특한 사고를 따라가는 길이니 미지의 길을 가는 것과 진배없는 거죠. 철학책 어려운 이유가 거기에 있어요. 친절한 단어는 몇 안 되고 분석하고 쪼개고 나뉘어서 여러 가지 갈래를 만들고 다시 그 갈래를 미묘하게 통합시키니 수학 못한 저 같은 사람은 헤맬 수밖에 없지요. 다행히 부록으로 나온 역자의 논문을 읽다보니 눈곱만큼 알겠나...아니? 하면서 약간 즐겁더군요. 나이 드니 나이만큼 철학에 대한 촉이 움튼다고나 할까, 철학은 결국 ‘생각하는 것’ 이란 생각이 들어요. ‘것’에는 과정이 있고 결론도 있어요. 과정과 결론이 한 단어 속에 있으니 굉장히 폭이 큰 거죠. 대단한 단어니까 우리 모두 거기 슬쩍 업혀서 ‘생각을 하는 철학자’가 되어도 괜찮아요. 


 여행을 좋아하지만 그 여행이란 게 꼭 비행기타고 혹은 기차를 타고 멀리 떠나야만 되는 것이 아니더라구요. 길이 눈에 보이는 길과 보이지 않는 무수한 길의 세상이 있듯이 여행도 그러하죠. 방안을 탐색하는 메스트르여행이 아니더라도 가령 사람과의 만남도 여행이 될 수 있고 동네 남의 정원을 드려다 보는 것도 여행이 될 수 있다는 거죠. 나무 한그루를 지긋이 바라볼 수 있다면 그 또한 놀라운 여행이구요.  가만, 한 평짜리 땅을 사계절 탐색해서 쓴 놀라운 책이 있었는데.... 음 제목이 생각이 안 나네요. 이즈음엔 아주 흔한 일이에요. 오히려 딱 부러지게 기억 나는 것이 신기한 시절이 되어부렀어요.ㅎㅎ  생각과 마음먹기가 엄청 중요해서 잘하면 여행을 무시로 할 수 있게 되는 거죠.

 

정발산 소경을 제목으로 써놓고 정발산에 오르지도 않은 채 무슨 서설이 이리 긴 거죠? 

초록 이파리가 솟구치고 나서야 정발산에 귀룽나무가 많다는 것을 알았어요. 좀 쳐진 가지들이 있어서 혹시 하긴 했지만 겨울나무들이야, 거기다가 볼품없이 젊고 어린것들에겐 별 눈길이 안가죠. 그래서 몰랐는데 초록 움이 돋으니 귀룽나무들예요. 나무들이 거의 하늘을 향해 손을 펼치지만 귀룽나무는 아래로 손을 내려요. 항복하는 것인지 겸손한 건지는 잘 모르겠어요. 귀룽나무의 새순의 빛깔은 참말로 싱그럽기 그지없는데 신기하게도 연두를 거치지 않는 연초록빛이죠. 사실 이른 봄 새싹들이 다 연두는 아니예요.  참나무들은 아기들 힘주어 울때처럼 발갛게 솟아나기도 하니까, 그러나 귀룽나무처럼 솟아나면서 초록을 바로 지니는 나무는 흔치 않죠. 봄산에 순 움터 오르는 소리가 들릴 무렵 귀룽나무는 홀로 이르게 연초록이예요. 초록순이 자라나며 어느 순간 꽃을 머금고 있다가 피기 시작하면  마치 어질디 어진 사람처럼 소박하며 풍성하죠. 자그마한 송이들은 다정하고 나무는 마치 긍휼을 아는 자처럼 여겨져 안기고 싶은 나무가 되죠, 


구기터널 지나 북한산 오르는 길에는 다른 어느 곳보다 귀룽나무가 많이 있어요. 그러고 보니 진관계곡 쪽에는 노간주 나무가 많고 삼천계곡 길에는 소나무 숲이 좋고 북한산성 쪽으로는 당단풍과 쪽동백 나무가 많죠. 숭가사 쪽으로 북한산을 오르면 나무다리 세 개를 지나요.  버들치교 우정교 귀룽교...그냥 버들치 다리 우정다리 귀룽나무다리...하면 훨씬 더 좋은 어감인데... 귀룽교를 지나면 아주 커다란 귀룽나무들이 몇 그루 있어요. 품이 하도 커 그 아래 여러 개의 쉴 자리를 만들어 놓았는데도 넉넉하죠.

이유 없이 정감 가는 사람 있듯이 유별나게 마음 가는 나무가 있어요. 기대 앉아 도란도란 말나누고 싶은, 그저 가만히 바라만 봐도 좋은 그런 나무가 귀룽나무에요. 광릉 숲 가는 길에 꽤 넓은 터를 차지한 무슨 농원 식당이 있어요. 원래 수목원 하던 곳에 식당을  낸 곳인데 옆으로 아주 넓은 뜰이 펼쳐지고 그네도 매져 있어요. 그곳에 엄청 커다란 귀룽나무가 있더군요. 어머, 이거 귀룽나무야 옆사람한테 말하는 순간 ‘식당 차리고 귀룽나무 이야기 하시는 분 처음이에요.’ 그곳 쥔장이시더군요. 아부지가 일구신 수목원 이야기도 그래서 들었고.... 

 귀룽나무가 가득 피어있을 때 귀룽나무 때문에  그곳을 '기도원'으로 착각한 자야 아가씨와 숲지기 우야 아저씨의 사랑이야기를 그린 ‘나무가 기도하는 집’은 이윤기선생의 글이죠. 읽으면서 딱 귀룽나무 같은 글이네....생각했어요. 수많은 나무 중에 하필이면 귀룽나무를.....할 필요가 없는 나무예요. 귀룽나무는, 모르겠어요. 귀룽나무를 사랑하게 된 것이 그 글을 읽은 후인지 전인지.....근데 그게 뭐 그다지 중요한가요? 죽고 사는 일도 아닌데.... 이제 정말 중요한 일은 죽고 사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돈도 권세도 미모도 필요 없는 나이가 되어가니까, 그렇다고 옷을 싫어한다거나 화장을 안 하지는 않지만....바라건대 죽고 사는 일도 가볍게 여길 수 있으면 좋겠다..... 싶다가 언감생심 무슨 욕심을 그렇게.....


이제 날마다 해질 무렵 정발산엘 갈 거예요. 가서 귀룽나무들을 바라볼 거예요.

이러니저러니 해도, 가지가 어떻고 몸통이 어떻고 이파리가 어떻고 겨울나무의 존재를 운운해도

이즈음  꽃핀 나무의 매혹을 어찌 따를 수 있겠어요.  


귀룽나무가 로그인한 글이네요.     

                           벚꽃앤딩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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