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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영 Apr 06. 2020

활짝 핀 벚꽃 나무 아래서

    


 오, 전 당연히 벚꽃은 향기가 없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만약에 저 흐드러지게 피어오르는 벚꽃에 향기가 그득하다고 생각해보세요. 그게 어디 나무겠습니까? 꽃이겠습니까? 아니요, 오딧세이를 홀리려던 사이렌이겠지요. 그러니 벚꽃에는 향기가 없어야 하구 말구요. 벚꽃의 고졸한 미는 바로 향기 없음에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는 거지요. 죽어있던 검은 나무에서 눈물 겨울만치 저리도 아름답게 솟아나는 것을요. 설령 우리가 모르는 깊은 몸살 끝에 솟아났다 할지라도 저렇게 아름다울 수 있으니 향기 없음이 오히려 당연한 거 아닌가요. 

 음악에 극진한 소양을 보인 공자가 음악의 완성도를 논할 때 韶(소:당시 연주되던 음악의 명칭)는 아름다움과 착함을 다했다고 했는데 벚꽃의 무향이 혹 착함과 아름다움이 아닐까 생각해본다는 거지요.  참으로 기이한 봄볕입니다. 그저 부드러운 바람과 합일하였을 뿐인데 죽어있던 나무에서 저리 꽃, 구름처럼 피어나니, 꽃은 나무가 지어내는 기쁨의 찬가입니다. 귀로 듣는 향기나 눈으로 보는 소리일 것 같기도 합니다. 자신도 봄꽃인 양 해마다 봄 멀미가 스멀거리며 다가와 봄 병을 앓는다는 시인도 있습니다만 사실 멀미는 어디에서나 우리에게 다가오곤 하지요. 이제는 정말 익숙해 질 법도 한데 여전히 운전을 하지 않으면 차멀미를 하곤 합니다. 그렇다면 운전을 할 때라고 해서 멀미를 안 하는 걸까요? 멀미는 하지만  단지 느끼지 못할 뿐이지요. 어쩌면 우리는 삶이라는 배에 올라 있는 동안 내내 멀미를 하며 살아가는지도 모릅니다. 단지 어느 때는 심하고 어느 때는 약해서 느끼거나 느끼지 못할 뿐이지요.    

 나무의 수피를 자세히 바라다보면 나무가 그저 편안하게 시간을 보내고 맞이할 거라는 단순한 생각은 접으실 수 있을 거예요. 그들 몸에 자욱한 거칠고 사나운 주름들은 마치 묵언의 수행이라도 하듯 수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까요, 사람들의 얼굴에 어리는 주름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깊습니다.  상처는 또 얼마나 많은지요. 그 상처들을 다시 몸으로 만들었으니....또 얼마나 많은 아픔이 있었을까요? 언제는 안 그랬을까마는 이 봄 오래 오래 살아온 나무들에 피어난 벚꽃을 바라보며 생각이 많습니다. 시간의 옹심이로 가득 찬 검고 강한, 그러나 죽어있는 것처럼 보이던 나무들의 부활을 보며 나도 그들처럼! 꿈꾸며 그리워하며 소망을 지니게 된다는 겁니다. 그대는 어디쯤서 꽃을 바라보시나요? 예를 들어 그 꽃이 벚나무라면 말이지요. 나무 아래 서서 나무 위를 바라보시는가요? 혹은 나무 곁에 서서  옆모습을 그윽히 느끼시는가요? 너무 눈부셔서 길 하나 사이에 두고 저만큼 숨도 못 쉬고 서계시는가요? 그도 아니면 못 본 척  휘적휘적 걸어가 버리시는가요? 서쪽으로 해가 저물 무렵이면 지상의 모든 색들은 해가 사라지고 어둠이 밀려오기 전의 경계가 주는 아릿한 정감을 덧입습니다. 햇살아래 맑기만 하던 색은 짙어지고 속곳 단단하게 갖춰 입은 여인의 치마 여민 모습처럼  감추어진 아름다움이 빛나는 시간이기도 하죠. 핑크빛 몽우리와 열리기 시작하는 작은 아이들의 입술 같은 꽃잎들, 아, 꽃들! 

  너무 아름다우면 무서울 것 같기도 해요. 아름답게 난분분 핀 벚꽃나무 아래에 사람이 없으면.... 아무도 없는 고요한 가운데  꽃만 무성하게 피어나 있으면.... 당연한 수순이라도 되듯 사카쿠치 안고의<활짝 핀 벚꽃나무 아래에서>가 생각납니다. 탐미적인 이 작가는 벚꽃나무 아래의 침묵을 기이할 정도로 두렵고 아름답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업고 있던 사랑하는 아내가 갑자기 귀신이 됩니다. 활짝 핀 벚꽃 나무 아래서 말이지요. 겨우 그 귀신을 떼어내 죽여 놓고 보니 세상에 그 귀신이 다시 어여쁜 아내입니다. 그 어여쁜 아내 위로 벚꽃의 낙화가 두어 닢 떨어져 내립니다. 어여쁜, 그러나 이미 싸늘하게 식어있는 아내의 얼굴에 내린 꽃 이파리를 만지니 꽃 사라지고.... 아내도 사라지고...... 남자도 사라집니다. 

 ‘벚나무의 가지를 부러뜨려 보아도/그 속엔 벚꽃이 없다/그러나 보라/봄이 오면/ 얼마나 많은/벚꽃이 피어나는가?(이뀨)’오래된 시인의 우미한 통찰력이 아니더라도 우리가 겨우 아는 것은 벚꽃 나무를 보며 ‘알 수 없다’고 중얼거릴 뿐입니다. 

나는 실제 종말론자이기도 하고 비관론자이기도 해요. 그러면서도 낙천주의자여서 감사할 거리가 많은 사람이죠. 욕심을 죽이기에는 종말론이 최고이고 소유욕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비관론처럼 잘 듣는 단방약이 없어요. 종말과 비관, 낙천이 결합하면 약간 시니컬한 성향이 되기도 합니다만 생각의 갈래가 많으니 오히려 텅 비어가는 것 같습니다.  코로나19가 창궐한 이봄, 이래저래  무정한  인생살이입니다. 저렇게 꽃은 유정하게 피어나고 명주바람은 다정하게 불어오는데 좋은 사람들 조차 가까이 할 수 없으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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